가자! G10으로 ⑭ 유연한 제도로 산업융합화 돕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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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훌륭한 바람개비를 만들었는데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앞으로 달려나가서라도 바람개비를 돌리겠다." 남중수 KT 사장은 지난해 12월 기자간담회에서 IPTV 서비스(TV에 인터넷을 결합한 통신서비스)가 허용되지 않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터넷 강국이라는 한국에서 IPTV.디지털방송 등 차세대 서비스 도입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방송과 통신 규제기관이 관할권을 놓고 3년 넘게 논의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강국이 미디어 강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까운 기회가 사라질 상황이다. 지난해 말 겨우 방송통신통합위원회를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임명권을 둘러싼 논의로 시간을 끌면서 수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기회가 미뤄지고 있다.

성큼성큼 앞서가는 기술을 제도가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대표적 사례인 IPTV 서비스만 놓고 봐도 기술 발전을 반영하지 못하는, 뒤진 제도 때문에 통신시장은 엄청난 손실을 볼 상황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분석에 따르면 2006년 기준으로 그해에 1300억원, 6년 뒤엔 5800억원 정도의 시장 손실이 예상되고 관련 장비 시장에서도 2006년 약 3500억원, 3년 뒤 약 5000억원의 손실이 예상됐다.

특히 한국 기술은 이미 세계시장을 압도할 정도의 수준에 올라와 있지만 막상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기술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1990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이 출원한 IPTV 관련 기술은 319건. 세계 전체 특허출원의 48% 규모다. 97년 111건, 2000년 69건 등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특허를 출원한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술이 제도 미비로 인해 낮잠을 자고 있는 상황이다. KT 이인원 과장은 "IPTV 서비스가 지연되면서 업체들의 기술 개발도 늦어지고 있어 문제"라고 걱정했다.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라는 점은 나라 밖 IPTV 시장 상황이 잘 보여준다. 한국보다 기술이 뒤진 홍콩.싱가포르.미국, 하다못해 중국까지 이미 IPTV를 상용화했다. 2003년 서비스를 시작한 홍콩의 경우 IPTV 가입자가 이미 케이블 TV 가입자를 능가했다. 사실 이 시장은 기술력에서 한참 앞서 있는 한국이 독차지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방통 융합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이 지지부진하면서 한국 기술이 세계시장을 독점하고 미디어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기술력이 뒤진 외국 업체들이 저 앞에서 뛰고 있는데, 막상 선진 기술을 가진 한국 업체는 제도적 걸림돌 때문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산업 간 융합 현상은 미디어 업계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다. 모든 산업에서 융합은 가속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인터넷과 방송.신문, 전자와 바이오기술 등 융합 신기술은 갈수록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융합 신기술이 나올 때마다 관할 영역을 다투는 부처 간 알력 때문에 관련 업계가 홍역을 치러야 할 처지다. 정부 각 부처가 관할 영역을 넘어서 보다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연한 자세를 갖춰야 할 때다. 정부가 새로운 큰 그림을 그려주진 못할망정 산업계의 기술 발전에 딴죽을 걸지는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김정수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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