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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린치 일병 용기있는 고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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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지난 5월 말 영국 BBC방송은 이라크군에 포로로 잡혔던 미 여군 제시카 린치 일병 구출작전은 연출된 혐의가 짙다고 보도했다.

린치가 치료받고 있던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병원 의사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병원에는 이라크군이 전혀 없었는 데도 중무장한 미군 특공대가 야간에 병원을 급습, 린치 일병을 데리고 간 것은 쇼에 불과하다는 지적이었다. AP통신도 이 병원 의사 약 20명을 인터뷰한 결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미 국방부는 병원 밖에서는 언제든지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린치는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최근 자서전 '나도 군인이다'를 내놓으면서 린치가 입을 열었다. "나의 시련을 군 당국이 조작한 것은 잘못이다." 특히 당국이 자신의 구출 과정을 필름에 담아 TV에 여러 차례 내보낸 것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진짜 교전상황이었다면 그걸 비디오로 찍을 여유가 과연 있었을까. 그녀는 TV에 나와 "군이 사실과 다른 내용을 만들어 알리는 바람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다.

린치의 '배반'을 접했을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부 장관의 심정은 어땠을까. 린치가 포로로 잡히기 전 탄약이 다 떨어지고 부상할 때까지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전했던 미 언론들은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을까. 그녀가 "총 한발도 쏘지 못하고 무릎꿇고 기도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웅이 필요한 시점에 그렇게 이미지가 조작됐던 것이다. 군과 국민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한 미국 정부의 필요에 의해 전혀 다른 인물로 그려졌다. 전쟁터에서 개인의 인격 따위는 국가기관에 의해 얼마든지 훼손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그러나 정부가 씌워주는 명예를 내 것이 아니라며 과감하게 벗어던지는 용기는 신선했다.

심상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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