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월요인터뷰

"현재 외교관 1900명 … 3000명으로 늘려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만난 사람 = 오영환 정치부문 차장

한국의 외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 민족끼리'와 명분에 갇혀 제대로 실리 외교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교부.외교관도 마찬가지다. 현 정부 출범과 더불어 시작한 조직 혁신은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고참 외교관만 정리하는 '외과 수술'에 그치는 인상이다. 재외 국민 보호를 둘러싼 영사 업무의 난맥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중앙일보가 15일자(1.4.5면)에서 '신(新)사고 외교'와 '외교의 재발견'을 강조하고 '서희 외교 아카데미를 세우자'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통 외교관 출신인 박건우(경희사이버대 총장) 전 외무부 차관을 만나 본지의 제안 내용, 외교력 강화 방안, 외교의 문제점 등에 대해 들어봤다. 박 전 차관은 김영삼 전 대통령 때 주미국 대사, 그 전에 외무부 미주국장을 지낸 미국통이다. 인터뷰는 20일 조선호텔에서 두 시간 동안 이뤄졌다.

-본지 제안에 대해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다.

"지금은 우리 외교에 큰 변화가 있어야 하는 시점이다. 중앙일보가 '서희 외교 아카데미' 설립을 제창한 것은 정말로 시의적절했고 잘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그 명제는 아주 훌륭하다.

언제, 어디서나 유무선 인터넷망으로 온라인 정보를 이용하는 유비쿼터스 시대에 걸맞은 외교 어젠다를 정하려면 서희 외교 아카데미를 포함해 국민적 논의를 지금 시작해야 한다. 범 정부 차원의 위원회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외무고시 폐지에 대해선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지만 과거에는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컴퓨터 하나만 갖고 있으면 미국 백악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속속들이 아는 상황이다. 이에 맞게 외교관을 선발.양성하고, 전문화해야 한다.

외교를 잘하는 나라의 제도나 관행은 국가원수의 철학과 결심에 의해 만들어졌다. 브라질의 외교관 전문 양성기관 '리우 브랑코 연수원(Rio Branco Institute)'이 생겨난 것도 그런 배경이다. 마침 올해 말 대통령 선거가 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문제가 아니다. 외교를 국내 행정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서희 외교 아카데미가 현실화하면 어떻게 운용하면 좋겠는가.

"선발 인원을 60명으로 하자고 했는데 적은 느낌이다. 기왕 뽑으려면 3~4배 더 뽑아 예비 외교관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아마 개인 회사에서도 이 아카데미에서 훈련받은 인적 자원에 대해선 욕심을 낼 것이다.

이 아카데미에선 이론적인 것도 좋지만 매너 등 실무적인 것도 가르쳐야 한다. 시험만 잘 본다고 해서 제대로 된 외교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손가락.머리카락 하나로 자국을 알리는 것이 외교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식사를 할 때 보면 후배 외교관들이 눈에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가 많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할 때의 매너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

미 국무부를 상대로 한 실습도 필요하다. 이런 분야에선 선배 외교관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외교관 부인도 함께 교육시켜야 한다."

-지금 한국 외교는 기로에 서 있다는 평가다. 주변국 관계를 포함해 바람직한 대안은.

"외교에는 절대 가치가 없고, 절대 승자도 없다. 뭔가 잘못됐다고 할 때 빨리 현실에 맞게 실리 외교를 펴는 것이 승자다. 그러나 그걸 모를 때 위기가 온다.

자기가 가는 것이 미로인지, 올바른 방향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말을 바꾸어 신뢰감에 손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동맹 관계의 축을 이루는 나라들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만약 '국내적인 입장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해해 달라'고 했을 때 듣는 사람은 이해하겠지만 언론 등을 통해 안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앞으로는 통일 외교를 펴야 한다. 그 전제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다. 독일의 예를 들어보자. 서독이 (미국 등과) 사사건건 상의하지 않고 동독과 통일을 이룰 수 있었겠나. 그것은 전혀 비굴한 것이 아니다.

평화 정착을 위해 주변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외교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다."

-우리나라 재외 공관 인력 배치 수는 지난 10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업무 양이나 중요도에 따라 재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데.

"재외 공관 인력을 신축적으로 조정하지 않는다면 외교가 아니다. 필요에 따라 이쪽을 늘리고 저쪽을 줄이는 신축성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 외교의 기본이다. 외교부는 '절대 인력이 모자란다'고 한다. 분명히 적다. 그러나 거기에만 집착하지 말고 공관 인력과 본부 인원을 신축적으로 재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도 있을 것이다. 외교관들의 생활 여건도 고려해야 하고."

-외교관 인력 부족 문제를 제기했는데 얼마를 더 늘려야 한다고 보는가.

"현재 1900명 선이라고 한다. 1600명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20년 가까이 걸렸다. 우리의 국민소득이나 외교 수요로 볼 때 욕심 내자면 3500명, 적어도 3000명은 있어야 한다.

주먹구구식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계산 근거가 있다. 전체 150개 재외 공관 가운데 주요 30개 공관의 인력은 미.일.중.러를 능가할 수는 없어도 엇비슷하게 따라가야 제대로 외교를 할 수 있는 여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훈령을 내리는 본부 인력의 확충도 필요하다.

행정자치부나 기획예산처에서는 안 통하는 얘기라고 하는데 외교를 외교답게 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대변혁이 절실하다. 대통령과 국민 여론이 뒷받침해 줘야 한다."

-외교력 강화를 위해선 후진국을 상대로 정부개발원조(ODA)를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 ODA는 밑거름이다. 그냥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ODA를 늘림으로써 우리 경제가 올라간다. 우리나라의 ODA와 대북 경협자금을 합치면 그 규모가 선진국을 넘어선다고 하지만 ODA는 대북 협력과는 별개 문제로 봐야 한다. 그것은 실리를 떠나 의무다. 한국도 ODA를 받아 ODA 공여국으로 거듭나지 않았나."

-정부는 2004년 이라크 테러단체에 납치.살해된 김선일씨 사건을 계기로 해외 공관의 영사 업무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렇지만 최근 재외 공관이 탈북자 문제에 소홀히 대처한 것이 밝혀지는 등 여전히 문제점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전직 외교관으로서 가슴 아픈 일이다. 외교부는 인력 문제 때문이라고만 하지 말고 평상시에 기계에 기름 치듯 주변을 유지해야 한다.

일이 터져서야 복구한다든지, 직원을 훈련시킨다든지 하는 임기응변으론 외교가 되지 않는다. 자기가 영사라고 할 때는 '나를 필요로 하는 재외 국민이 있다'는 인식 아래 끊임없이 훈련하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

현지 고용인들이나 외교관에 대한 교육이 부족했던 점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인력 부족만으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이것을 외교관 자질 문제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과거에 비해 외교 환경이 급변했다. 인터넷 시대를 맞아 외교관들은 단순 정보 전달을 넘는 '지식 외교'를 요구받고 있는데.

"평생을 바쳐온 분야가 한.미 관계인데 돌이켜 보면 '내가 본 뜻을 모르고 외교관 생활을 했었구나'하고 자책할 때도 있다. '보안, 보안'이라고 해서 일을 그르치지 말고 물을 것은 묻고, 공부할 것은 공부해야 한다. 정보기술(IT)시대에 알려고 하면 무엇을 모르겠나. 외교 전문가만 외교를 하는 시대가 갔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외교관들이 변화한 세상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국민이나 외국을 상대로 한 외교(public diplomacy)가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미국의 부시 정부는 부시 대통령의 공보 비서인 캐런 휴스(여)에게 국무부의 대내외 홍보 담당 차관을 맡겼을 정도다. 엄청난 돈을 들여 백악관과 국무부의 브리핑이 실시간으로 나오도록 한 것은 좋은 예다.

우리 정부가 잘 못하는 분야의 하나가 퍼블릭 디플로머시다. 중복된 얘기지만 이 분야에서도 선배 외교관들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직에 있는 외교관들보다 보안 문제에서 자유로운 만큼 더 많은 호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부연하고 싶은 것은 언론과의 관계다. 언론으로부터 비판 받는 것이 겁나 말하지 못한다면 외교관 자격이 없다. 국가 이익을 위해 국내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하면 이를 모른 척하는 언론이 있겠나. 정말 필요한 부분은 사전에 언론에 협조를 구할 필요가 있다. 언론의 뒷받침 없는 외교는 없다."

-후배 외교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외교관은 전치사 하나를 두고 테이블에서 싸운다. 실력은 기본이다. 거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인성이다.

예를 들어 남의 나라 외교관이 거들먹거리면서 잘난 체 하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신뢰성을 주지 않을 때는 그 나라 외교정책이 아무리 잘 돼 있어도 먹혀들지 않는다.

반드시 마당발이 되라는 뜻은 아니지만 '저 친구 없으면 파티가 안 돼'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됨됨이나 입심, 태도가 중요하다. 또 많이 알아야 한다.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그러면 사람을 다시 본다. 일본 외교관들이 이것을 잘한다."

정리=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박건우 전 외무부 차관은

▶1962 외무부 입부(고시 14회)

▶1965 주유엔대표부 3등 서기관

▶1972 외무부 총무과장

▶1973 주미국 대사관 참사관

▶1982 외무부 미주국장

▶1985 주콜롬비아 대사

▶1988 외무부 의전장

▶1991 주캐나다 대사

▶1994 2002년 월드컵축구 유치위원회 사무총장

▶1994 외무부 차관

▶1995 주미국 대사

▶1998 4자회담(남북, 미.중) 수석대표

▶2000 경희대 국제대학원 원장

▶2003 경희사이버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