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회의 9월까지 전열정비/「상반기 마무리」들어간 대정부투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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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5개 소속단체 통폐합 「재충전」/“사분오열된 재야 일단 결집” 자체평가
지난 4월26일 강경대군 치사사건 이후 결성돼 시위정국을 주도해온 「공안통치 분쇄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가 상반기 투쟁을 마무리하고 전역량을 9월 대투쟁에 결집시키기로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대책회의는 강군치사에 이어 공안통치와 실정에 항의하는 일련의 분·투신사태 속에서 55개 재야단체의 결집체로서 87년 6월 항쟁이래 최초로 반정부연합전선을 구축,강도높은 정권퇴진운동을 전개해왔다.
그러나 정원식 국무총리서리 폭행사건,김귀정양 합의부검,8일 제5차 국민대회의 저조한 열기 등을 감안할때 상반기투쟁은 하강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대책회의의 판단이다.
이에 따라 대책회의는 10일로 예정된 제6차 국민대회를 취소한데 이어 광역선거가 실시되는 20일을 전후해 1단계 투쟁을 마무리짓고 8월말까지 내부적인 조직정비작업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대책회의의 방침에 따라 김양 대책위도 이번주중 사건진상 발표(10일),검찰수사 발표에 대한 반격(11일),자체 현장검증(12일),내무장관 등 치안책임자와 현장지휘자 형사고발 등의 수순을 거쳐 20일 이전에 김양장례식을 치를 계획이다.
김양 장례식은 당초 유족의 뜻에 따라 부검후 수일내로 치를 것도 검토됐었다.
그러나 김양의 어머니 김종분씨(53)등 유족들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이왕 부검까지 실시한 마당에 진상이 규명돼야 장례를 치르겠다』는 입장이어서 확정을 못하고 있다.
김양대책위는 병원측의 양해를 얻어 장례식때까지는 병원에 남을 예정이다.
지난 18일 강군 장례직후 명동성당으로 옮겼던 대책회의는 김양 장례식과 광역의회선거가 끝나는 20일을 전후해 일단 성당을 떠날 계획으로 있다.
대책회의는 이와 동시에 상설기구인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근거지를 지금까지와는 달리 대학이나 공공장소가 아닌 개인사무실로 한다는 계획아래 장소를 물색중이다.
대책회의는 김기설씨 유서대필 용의자 강기훈씨와 한상렬 공동의장·이수호 집행위원장 등의 검거를 위한 명동성당에의 공권력 투입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현재보다 훨씬 긴박한 상태에서 대치했던 87년에도 성당에 대한 공권력 투입은 없었고 김수환 추기경·경갑실 수석보좌신부 등으로부터 20일께까지는 머물러도 좋다는 언질을 받아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권력투입이 이뤄질 가능성에 대비해 「완벽한 대처방안」을 수립해 놓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설사 지도부가 대량검거된다고 해도 최근의 재야운동이 소수 명망가에 의존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조직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검거를 대비한 예비지도부까지 준비돼 있어 투쟁의 지속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대책회의가 9월을 새로운 투쟁의 기점으로 삼은 것은 이 시기에 여권의 내각제 구도가 구체적으로 떠올라 쟁점화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현재의 민자당 구조상 대통령제는 내분가능성이 높고 노태우 대통령의 퇴진 후 입지가 보장되기 어려우므로 정기국회 개원에 맞춰 내각제가 추진되리라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대책회의는 이와 관련해 최대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정권대체세력으로서의 능력과 이미지를 보강하는데 기존역량을 총동원하는 한편 범민주세력과 다양한 수준에서 손잡는다는 전략을 세워 놓았다.
이같은 정세관은 「5,6월투쟁 평가」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올 상반기투쟁은 비록 내세울만한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내용면에서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는 것이 이들의 자체분석이다.
대책회의는 투쟁성과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던 이유로 강군사건 직전까지 재야가 너무 분열돼 있어 조직적인 대응이 이뤄지지 못했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 양김씨가 국민운동본부에 적극 참여했던 87년 당시와는 달리 신민당과 김대중 총재가 대책회의와 끝내 일정한 거리를 두는 바람에 정권대체세력으로서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던 사실도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올 상반기는 노대통령의 임기가 아직 많이 남았고 내각제라는 정권의 장기집권 구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집권말기를 맞아 호헌선언을 했던 87년과는 크게 달랐던 조건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 강군사건의 열기가 수그러들 무렵에 발생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씨 사망사건을 전노협등 노동운동권이 국민적 차원의 쟁점이 아닌 노동자문제로 국한시킴으로써 5,6월 투쟁에 적극 활용하지 못한 것도 전술상 착오였다는 분석이다.
더구나 김기설씨 유서대필 수사와 외대생들의 정총리서리 폭행사건으로 재야 핵심인사들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지고 시민들의 지지열기가 식은데다 대학가의 여름방학까지 겹쳐 9월까지는 사실상 투쟁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책회의는 상반기 투쟁을 계기로 정권퇴진운동이 본격화할 수 있었고 사분오열된 재야가 결집됐으며 제도권 야당으로부터 독립하게 됐다는 점 등을 중요한 성과로 자체평가하고 9월 반내각제 대투쟁의 전망을 낙관하고 있다.<이하경·이수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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