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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있는 식생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각기라는 병이 있다. 한글 사전을 찾아보면 비타민 B의 부족에서 오는 영양실조 증세의 하나로, 다리가 붓고 마비돼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는 범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의학적으로 보면 비타민B1 결핍돼 심혈관계와 신경계의 기능에 지장이 와서 다양한 증상을 보이는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사망할 수도 있는 법이 바로 각기병이다. 비타민 B1은 곡식·쇠고기·돼지고기·콩 등에 풍부하게 함유돼 있으므로 합리적인 보통식사로 충분히 보충될 수 있는 영양분이다.
장기간에 걸쳐 합리적인 보통식사를 못하게 되면 비타민 B1이 부족해 각기병에 걸리게 된다. 국민소득이 늘어나고 식생활이 현저히 개선된 지금 특히 젊은 사람에게는 전혀 실감되지 않는 병으로 뒷전으로 밀려있는 셈이다. 그러나 전쟁을 겪고 또 보릿고개·절량 농가로 상징되던 가난한 시대를 살아온 나이 많은 분들은 각기병의 비참함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얻게 되는 범이므로 그만큼 더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이만큼 잘살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런 병이 없어졌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자진해서 각기병에 걸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알코올 중독 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다. 술을 마시면 건강한 사람도 비타민 B1이 체내로 잘 흡수되지 않는다. 거기에다 균형 된 정상적인 식사는 멀리하고 술만 마시므로 당연히 비타민 B1이 더 부족해질 것이다.
없어서 못 먹는 경우가 아니고 있어도 못 먹어서 범을 얻는 셈이다. 오랜 술 때문에 간이 나빠지면 각기병이 더 쉽게 발병될 수 있다. 또 오랫동안 술만 마시던 사람이 다시 식사를 시작할 때 갑자기 각기병 증상이 악화될 수 있다는 위험도 있다.
식생활이 왜곡된 이유는 전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비슷한 경우가 또 있다. 날씬한 체격을 유지하기 위해 소위 다이어트를 계속하는 젊은 여성과 일부 청소년들이 이에 해당된다. 청량음료를 즐겨 마시고 구미에 맞는 일부 음식만 즐기는, 말하자면 편식이 생활화돼 있는 경우 각기병의 후보자로 충분한 자격을 얻게되는 셈이다.
TV를 보는 동안 계속 간식을 하다보면 자연히 나타나는 식 습관, 즉 청량음료와 간식의 비중이 높은 잘못된 식생활은 부모가 나서서 잘 교정해야 한다. 없어서 못 먹게 되고 그래서 각기병을 얻는 경우가 없어진 오늘날 잘못된 식생활로 자진해서 각기병을 얻지 않도록 하자.【서정돈 교수<서울대 의대·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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