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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바보로 아는 정치/김동수(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세상에 별 희한한 사전도 있는가 싶다. 투표란 말의 뜻은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자유인이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돼있다. 유권자라는 뜻을 찾아보니 「다른 사람이 선택한 인물에게 투표하는 신성불가침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다.
좀더 뒤적여 보면 점입가경이다. 정치란 말은 「정의라는 미명밑에 감추어진 이해관계의 충돌로 사리를 위해 공공을 빙자하는 것」이고 의회는 「법률을 무효화하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의 집단」인가 하면 국민은 「법률제정때 무시해도 좋은 요소」다. 게다가 사기가 「정치권력의 기초」라는등 고약하기 이를데 없다.
사전 이름이 『악마의 사전』으로 돼 있으니 분명 뭔가 심하게 비뚤어진 사람들이 판치는 나라에서나 있을법한 빈정거림이다.
이 사전은 원래 앰브로스 비어스란 미국 문인이 1백여년전 세상을 풍자하느라 1천여개의 어휘뒤에 벌어지는 일들을 뒤집어 풀이한 글을 모은 책이다.
지난 50년간 헌정사를 대충 훑어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우리처지를 생각해 볼만큼 흡사하게 묘사했는지 감탄할 정도다. 번잡스럽게 지난날을 들추지 않더라도 때마침 불어닥친 광역의회선거에서 빚어지고 있는 불과 며칠동안의 소동만 보고도 그의 낱말풀이에 우리네 처지를 비추어 볼수 밖에 없는 서글픈 심사를 주체할 길이 없다.
금품수수니,타락이니,과열이니 하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악마의 사전식 바보놀음 말고 보다 근원적이고 언뜻 눈에 띄지 않는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의식을 들여다 보자.
민자당의 최고위원 한분이 지방행사에 내려가 이번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 예상하며 희희낙락하더라는 고십기사가 며칠전 신문에 보도된 일이 있다.
「민자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밉지만 다른데 맡길곳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였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아무리 싫어도 대안이 없으니 별 수 있겠느냐」는 투다.
그 뻔뻔스러움에 대해 바로 엊그제 있었던 어느 학자의 말을 빌려 답하고 싶다. 『우리사회의 진정한 진보를 방해하는 것은 바로 대안이 없다고 하는 생각,대안이 없기때문에 현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세력의 기만성이다. 대안이 없다라는 거짓 우려는 항상 대안의 생성을 봉쇄하고 가능성을 멸절한다.』
지방자치제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풀뿌리민주주의라는게 정답으로 되어있다. 정치한다는 모든 사람들이 신주라도 떠받들 듯 입을 모아 열창하는 소리다.
그런데 그렇게 거룩하던 신앙의 대상인 지방자치선거가 경우에 따라선 별것아닌 행사 밖에 되지 않는다.
정당의 공천을 싸고 뒷거래의 구린의혹을 풍기며 의원들의 탈당사태가 빚어지면서 「그까짓 지방선거」정도로 둔갑해 버리기도 한 것이다.
신문보도들이 옳다면 『일개 광역의회 후보자가 자기의사대로 공천되지 않았다 해서 당을 떠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신민당총재가 말한 것으로 돼있다.
탈당소동에 따른 잡음의 시비곡직은 접어두더라도 이번 선거가 하찮은 「일개」광역선거로 야당총재의 눈에 비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방선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시각도 옳지 않지만 그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경우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는 시각의 이중성이다.
신민당대변인의 말을 빌리자면 이번 선거는 6공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이고 『현정권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내리는 선거다. 그래서 선관위로부터 경고를 받아가면서까지 총재를 포함,중앙당수뇌들이 지방순회활동을 통해 기를 쓰고 선거현장에서 집회를 갖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앞뒤가 뒤틀리는 껄끄럽기만한 이율배반의 냄새를 풍긴다.
또하나 여야의 떳떳지 못한 행태를 보자. 이른바 공명선거추진본부의 하는일이다.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공정한 선거운동보다는 상대방의 불법과 추악상을 잡아내는데 더 큰 목표를 두고 있는 인상이다.
정책을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방의 악성을 극대화시키고 그것을 본질요소인 것처럼 부각시켜 자기네 입장을 미화시키고 정당화시키겠다는 심보다. 심하게 말해 스스로 앞장서 깨끗한 선거 치를 생각을 하기보다는 서로가 상대방이 불법을 저질러 악수를 두어주었으면 하고 기대라도 하는것 같다. 「자,상대방이 저렇게 나쁘니까 대안은 차라리 우리밖에 없지 않느냐」며 반사적 이익이나 챙기겠다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국민들을 상대로 한 정치라기보다는 자기네들끼리의 정치,국민은 무시해도 좋은 요소밖에 안되는 그런 의식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들은 분명히 무엇이 합법이고 불법인지 가리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모를 바보도 아니다. 다만 국민을 바보로 착각하는 바보일 따름이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바보다. 그러나 진실을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범죄자다.』 어느 연극대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악마의 사전풀이처럼 국민이 스스로 바보가 되지 않고 나라를 망치지 않기위해서 이번 선거는 그러한 바보와 범죄자들을 가리고 몰아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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