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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 르포 특별연재|포수생활하다 독립운동 투신 용병술 능한 명사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필자가 이번 중앙아시아에 오면서 계획한 중요한 목표의 하나는 바로 홍범도 장군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관련된 사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운동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그에 대한 연구와 저서가 이미 국내에 많이 나와 있다. 필자자신도 그에 대한 글을 두 편이나 쓴 적이 있다. 그렇지만 그에 관해 아직도 의심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알마아타에 가면 꼭 한번 가보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앝마아타에 와보니 유적지가 있는 크질오르다까지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차가 한시간이며 비행기로 1시간40분, 그리고 기차로는 하루 종일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역을 맡은 김종훈씨와 카자흐공화국 국립 아바이 사범대학의 김 오리그교수에게 문의하니 비행기표를 구할 수 있고 외국인이라도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 오리그교수는 마침 사디코프 도크무하메드살메노비치 총장이 자기의 대학 동창이며 평소 친한 친구가 크질오르다의 공산당 위원장이므로 이 일에 대한 편의를 도모하도록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리하여 3월17일 6시50분, 김오리그 교수와 함께 알마아타릍 출발했다. 1시간40분이 지난 8시30분 마침내 크질오르다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항에는 뜻밖에도 크질오르다의 공산당위원장·시장·주장을 비롯해 재소 한인회 회장과 꽃다발을 든 한인여학생 2명 등이 마중 나와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3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탔는데 필자는 시장·통역자인 조만근씨(75)와 동승하게 됐다. 조씨는 이곳에는 노인 이외에 한국말을 잘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통역을 맡게됐다고 말했다.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청년 못지 않게 건장해 보였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는 약 30분 동안 시장이 크질오르다의 현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잠시 후 도착한 호텔 방은 지금까지 소련에서 머문 곳 가운데 가장 크고 좋은 방이었다. 카자흐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는 곧바로 홍범도장군 묘소로 향했다.
묘소에 도착해서도 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계자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필자는 곧장 홍범도 장군의 묘와 동상 앞으로 가 큰 절로 참배했다. 그 때의 감회는 지금도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홍범도 장군에 관해 주위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았지만 잘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아쉬웠다. 그러나 조만근 노인이 오후 3시쯤에 홍범도 장군과 함께 원동(연해주)에서 활동했던 사람들과 이곳에서 장군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해 우리는 곧 다음 예정지인 홍범도 장군의 집터로 갔다.

<살았던 집은 헐려>
홍범도 장군이 살았던 집은 얼마 전에 헐리고 다른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그 집 벽에 기념패가 붙어있어 홍범도 장군의 집터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집 앞의 거리는「홍범도 거리」라고 했다. 타슈켄트에서 「김병화 거리」를 보았을 때의 기쁨과 긍지가 되살아나는 듯 했다.
다음엔 한국인학교로 안내됐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강당에는 많은 학생과 재소 한인들이 모여 있었다. 소련에 와서 한국인학교와 학생들, 그리고 한자리에 수백 명씩이나 모인 한국인들을 본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마치 한국에 와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강단으로 안내된 필자는 먼저 반갑다는 인사를 하고 이어 재소 한인의 역사와 현재한국의 발전상 등에 대한 간단한 연설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에 가면 이곳에서 본 재소 한인사회의 현실을 잘 전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연설 후 학생과 어른 몇 사람의 질문이 있었다.
그 가운데 크질오르다 고려문화센터 산하 일요학교 교장이라는 케나제스다 페르로브나씨(여)가 특별히 필자에게 부탁할 말이 있다면서 직접 글까지 써 주었다. 그 편지는 러시아어로 돼있었는데 내용인 즉『박 위원장이 우리 학교를 방문해 줘 대단히 감사하다. 지금 소련에는 한국어를 가르칠 선생도 없고 교과서도 없으며 한글사전도 없다. 한국에서 꼭 지원해 주기를 부탁한다. 또한 한국에 가 조국이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고싶다.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늦은 점심을 마치고 조만근 노인 집으로 갔다. 옛날 홍범도 장군과 같이 일했다는 노인과 극동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노인들이 이미 와 있었다. 아침부터 무척 만나고 싶던 사람들이었다.

<75세로 세상 떠나>
조만근씨 집에서는 귀한 한국손님이 왔다며 개를 잡고 술과 안주를 차려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 놓았다. 조만근씨의 부인은 주동일이라고 하는데 올해 81세로 남편보다 6년 연상이었다. 그녀는 1927∼28년께 서울에서 고등보통여학교를 다닐 때부터 공산당운동을 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경력을 말하지는 않지만 일제시대 여성 공산주의운동가인 것 같았고 투쟁경력도 있어 보였다.
차려 놓은 음식을 먹으면서 홍범도 장군과 한국의 현실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그들 중 몇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두었다. 즉 주승영(77)·마하노프두르간바(소련 인민대의원 겸 크즐오르다 주립병원장)·김 다위드 페도세에비느(83)·주안톤(8l)·박 빅토르 바실리에비치(78·건축기사)·김만선 니콜라이비치(크즐오르다 주립병원 내과의사)씨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김 다위드 페도세에비느씨는 1920년대 말에서 1931년까지 원동 우스리스키(추풍)등지에서 홍범도 장군과 참께 의병으로 독립전쟁에 가담했다고 한다. 그후 크질오르다에서도 홍 장군과 함께 활동했다는 그는 그때의 일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홍범도 장군은 적은 수의 병력으로 항상 적에 아주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전법을 구사했다고 한다. 싸우기 전에는 대부분 높은 전신주의 전선을 절단해 일본군의 통신망을 두절시켰다는데 그때마다 장군이 직접 총을 쏘아 전선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과연 그는 명사수였던 것이다.
장군은 농민·포수에서 일어나 의병·독립군·혁명군으로 활약했다. 그가 총을 쏘기 위해 오른쪽 수염을 올렸다든지, 총알을 매우 아끼는 습성이 있었다든지 하는 등의 이야기를 김 노인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김노인의 이야기가 끝나자 다른 사람들도 다투어 홍장군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들과 함께 홍범도 장군의 출생지가 평양인지 개성군인지 하는 문제, 강원도에서 의병활동을 했는지의 여부, 함경도에서의 포수생활과 의병활동 등 평소에 필자가 궁금히 생각하던 부분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청산리독립전쟁, 노령지역에서의 항일운동,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인한 크즐오르다에서의 콜호즈생활 등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홍장군과 조선극장 총 연출가 태장춘과의 깊은 관계, 그가 소중히 여기던 조선극장이 크질오르다에서 알마아타로 옮겨가게 된 과정 등에 대해서도 그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홍장군이 1943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의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는 몹시 숙연해졌다. 일본제국주의와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조국인 한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이역만리에서 눈을 감아야했던 홍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는 모스크바에 있는 작가 김세일(세르게이 표도르비치)씨 이상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추천해 주기도 했다.
다음날인 3월18일은 레닌그라드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동행한 방상현 박사가『어제 김 오리그 교수의 부친소개로 북한의 김일성 대학 전 부총장인 박일씨를 만나 출발 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10시쯤 호텔로 찾아온 박일 전 부총장과 약 한시간 정도 방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박 전 부총장은 l91l년 함경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박영호씨는 1910년 용정의병에 참가했다가 그후 김좌진장군의 부하로 청산리 독립전쟁에도 참전한 역전의 용사였다. 박일씨는 원래 용정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찾아 연해주 감자밭 골(하산)로 이주하게 됐다고 한다.
어린 시절 연해주에서 공부했다는 박일씨의 본명은 박일.

<한국 성장에 관심>
당시 소련에 와있던 작가 조명희 선생이「일」자는 일본을 뜻하는 것이어서 재미없으니「一」로 고치라고 해 박일로 쓰게 됐다고 했다. 그는 레닌그라드대학을 졸업한 후 1942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l922년 시베리아에 출범한 일본군이 철군한 이후 소련 혁명정부가 한국독립군을 차별대우하자 그는 레닌그라드로 유학하기 전 한때 흑룡강 지류인 백산골에서 살았다.
그는 철학사(준박사)로서 김삿갓을 비롯해 한국고전 및 철학사에 관한 논문들을 몇 편 썼으며 우리 시조를 러시아어로 번역해내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는 카자흐종합대학에서 철학강좌를 맡고 있다고 했다.
박일 부총장은 단구에 매우 강한 인상을 풍겼다. 그는 김일성대학 부총장 시절을 회고하며 당시 총장은 김두봉씨였으나 그는 명예총장에 불과하고 실제 일은 거의 자신이 맡아서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에서 망명한 사람이나 북한에 대해서는 물론 어떤 특정인에 대해서도 일체 비판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한국의 경제성장과 학문적인 성장 및 국제적인 비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는 말만 덧붙였다. 그리고 같은 민족으로써 통일을 염원하고 있으며 향후 한국을 한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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