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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암행어사 특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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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박정희 통치 18년의 장막 뒤에는 수많은 비사가 여지껏 살아 숨쉬고 있다.
권력의 양지에 펼져진 스토리보다 그 뒤안에서 얽히고 설킨 비밀보다 사연이 더 많은 법이다.
윤필용의 몰락, 김대중 납치, 김형욱의 실종 등 굵직한 사건 마다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고드름처럼 내달려 있다.
절대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통치 조직이 필요하지만 또 그것을 컨트롤하는 또 다른 비밀조직이 있게 마련이다.
그와 같은 권력의 비선 조직 중 하나가 유신말기 권부를 긴장시켰던 이규광 사설정보대다. 권부의 부정부패에 염증과 위기의식을 느낀 박 대통령은 78년말 초야에 묻혀 지내던 정보통 이씨를 불러「암행어사」의 특명을 내렸다 한다.『민심을 진단해보고 당·군·정보부 할 것 없이 고위인사의 부정을 은밀히 조사하라』는 내용이었다.

<정보 귀재로 손꼽혀>
10·26에 즈음해 박 대통령은 조금 세게 표현하자면『누구집 장롱에 금반지가 몇 돈이 있다』는 것까지 꿰고 있었고 이 조사를 바탕으로 일대 당정쇄신까지 마음먹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무능하고 재산관계에 말이 많았던 김재규 정보부장을 이씨로 갈아치우려고까지 했다는 설도 있을 정도였다.
사설정보대가 캐냈던「물건」자체도 흥미진진한 스토리지만 더욱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비화의 주인공인「안개 속의 사나이」이규광이란 대목이다. 그가 손꼽히는 정보귀재인 것도 그렇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인데다 82년5월 세상을 뒤흔들었던 장영자 여인의 형부라는 혈연 관계도 세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1·2·3·4·5공을 거치면서 통치권력과 비밀스런 인연을 맺어왔던 이씨는 과거처럼 현재도 일체의 증언을 거부하면서 은둔을 고집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 인물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사실의 조각들은 사설정보대의 숨겨졌던 사연들을 전하고 있다.
이후락·박정희 비서실장도 모를 정도로 은밀히 박 대통령을 만나고 차지철 경호실장과 접촉하던 이씨가 사설정보대 특명을 받은 것은 78년 말께였다 한다.
이규동(이순자씨의 부친·80·육사2기), 이규승(78·육사7기), 이규광(66·육사3기)3형제 중 가운데인 규승씨는『동생은 그 사실을 공개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유신말기의 부패상은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며 증언에 응했다. 이씨 3형제는 만주시절 만주군 장교였던 박 대통령과 교분이 있었고 특히 스파이 활동을 위해 일본 관동군에 침투해 있었다는 규승씨는 박 대통령과 나름대로 끈이 있었다고 한다.
규승씨의 증언.
『박 대통령은 말기에 공화당당직자·군고위장성·정부고위인사들의 부정부패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 자신 통치를 위한 정치자금 말고 개인적 치부에는 털끝만치도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라 부하의 비정직성에 대해 걱정이 많았죠. 그래서 뒷조사를 해보려고 동생을 부른거에요. 물론 정보부·보안사·검찰·경찰 등 나름대로의 정보조직이 있었지만 그런 비밀스런 일은 아무한테나 맡길 수 없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이철희·장영자 사건 때 잡혀들어 갔던 동생만을 생각해 어떻게 그런 일을 맡을 수 있었을까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르지만 그건 동생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59년에 헌병감 지내>
동생은 59년 육군헌병감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군부정부패를 파헤지는 숙군 작업을 했잖아요. 그때부터 박 대통령은 동생의 강직성을 높이 샀던 겁니다.』
규승씨는『동생은 한국에서는 내노라 하는 정보통이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누구보다도 적격이었다』며 말을 이었다.
『동생은 죽 헌병병과경력(대구헌병학교장·헌병부사령관·1군헌병참모)만을 쌓았기 때문에 정보엔 귀신이에요. 정보계통에선 일어로 삼바가라스(삼우도·삼총사·특출한 세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정보가 빠르다는 세 사람을 가르키는 거죠. 동생하고, 육사출신으로 경찰지휘관과 5동 청와대 고위간부를 지낸 P씨, 그리고 공화당의원을 지냈던 J씨 세사람이죠.』
10·26후부터 지금까지 항간에는『차지철 경호실장이 이규광 장군을 고용해 사설정보활동을 했다』는 풍문이 맴돌고 있으나 관계자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이규광씨의 비밀작업은 박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이루어진 것 같아. 이씨의 부인 장성희씨(장영자씨 언니)는 「그날밤」에 대해서 이렇게 기억했다.
『78년 12월 21일이었어요. 그날이 동짓날이라 지금도 잊지 않고 있지요. 저녁 7시쯤인가 여의도 한양아파트에 있던 우리집으로 차지철 경호실장이 찾아왔어요.「각하께서 내일 이 장군을 뵙자고 하십니다. 저더러 직접 가서 말씀드리라고 하셨죠」라고 해요. 그래서 다음날 저녁에 이 장군께서 청와대 올라갔고 그 다음날 새벽2시가 돼서야 돌아왔어요. 좀처럼 말을 안하시는데 물어물어 겨우 몇마디 들었어요. 박 대통령께서 나랏일로 무척 고민하시더래요. 「이 장군, 어떻게 하면 좋겠나. 민심이 좋지 않은 모양인데 제대로 된 보고는 하나도 안 올라오고…. 민심 돌아가는걸 알 수 있어야지 말이야」라고요.』
이씨의 사설정보대에 몸담았던 Q씨는 한걸음 더 깊숙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 대통령은 그전에도 이 장군을 정보계통에 쓰려고 했었다고 들었어요. 76년인가 신직수 정보부장을 불러「이 장군을 위해 중정 자리 하나 만들어보지」라고 했다는 거죠. 그런데 이 장군은「5·16후부터 아무 일도 안하고 놀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맡겠느냐고」거절했대요.
사실 정보팀 때도 이 장군은「내 자신 오점이 많은데 내가 나서면 각하께서 도움이 되겠습니까」고 사양했대요. 그래도 박 대통령이 부탁하니까 이 장군은「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일대 수술을 해야한다」며「작업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해달라」고 주문했답니다. 이 장군이 특별히 비밀보장을 요구한 것은 사연이 있어요. 박 대통령은 곧잘 부하들끼리 박치기시키는 수법을 쓰곤 했잖아요. 어떤 기관이 어떤 부하의 비위사실을 조사해오면 그것을 그 부하한테 보이면서「이렇다는데 어떻게 된거냐」는 식으로 물어본다는 거죠. 그걸 잘 알고 있는 이 장군은 미리 그런 식으로 쐐기를 박은 거예요.

<중정부장까지 조사>
이 장군이 그렇게 나오니 박 대통령은「좋아 그러면 비밀사무실을 얻고 사람을 모아서 일을 한번 해봐. 필요한 자금은 내가 대줄 테니」라고 했지요.』
이규광 정보대는 곧 활동을 개시했다. 효자동 경복고교 앞 가정집을 안전가옥으로 바꾸어 본부로 삼았다. 군정보·헌병계통의 대부 이씨가 끈끈한 유대를 맺고있던 동료·후배 15∼16명이 차출됐다. 이들 대부분은 정보기관에서 일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정보부·보안사에서 파견된 요원도 있었다.
정보요원이었던 Z씨의 증언.
『10여명의 본부핵심 요원 말고도 전국의 세포조직을 활용했습니다. 핵심요원들은 대부분정보기관을 떠난 사람들이지만 지방조직은 현직이 많았죠. 본부에서 조사대상을 골라 작업을 추진하면서 지방조사가 필요하면 도움을 받는 시스팀이었죠. 모든 게 점 조직으로 운영돼 정보 요원이 몇 명이었는지 정확한 숫자를 아는 사람은 이 장군 뿐일거예요.
중심작업은 당·정·군·정보부 고위인사의 부정축재, 비리관계를 캐는 일이었어요. 당시 대한민국을 주름잡는다는 20∼30명 정도가 1차 주요대상이었죠. 청와대비서실장·공화당당직자·군참모총장에다가 차지철 경호실장·김재규 정보부장까지 조사했어요
이후락·박종규씨 등 10·26후 부정축재자로 몰린 인사들이 역시 깨끗하지 못한 걸로 드러났어요. 공화당 당직자 모씨의 친척 한사람은 고향에서 비리관계로 원성이 자자했고요. 군고위간부 L씨는 장성 진급 등 각종 청탁을 받고 뇌물을 챙긴 사실이 포착됐지요. L씨는 차 실장과 가까운 사람이라 차 실장이 문제삼지 말자는 뜻을 전해왔지만 이 장군은 박 대통령한테 직접 보고 한 걸로 알고있어요. L씨는 결국 옷을 벗었지요.
L씨를 숙정하고 나니 우리 정보 활동에 관한 서슬 퍼런 소문이 돌기 시작했던 모양이에요. 당정인사들이 겁먹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조사 내용도 다양해져 여자관계까지 캤고 여권뿐만 아니라 야당인사까지 뒷조사를 했어요.』
이규광 정보팀은 철저한 대내외 보안 속에서 움직였던 모양이다. 같은 요원끼리조차 누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차 실장만은 알아>
육사8기 출신 인사들의 내막에 관해 자문하러 효자동 아지트를 찾아간 적이 있는 Q씨의 회고.
『내가 그 집에 들어서 보니 굉장히 넓은 거실에 10여명 정도가 자기 책상에 앉아 서류 작업을 하고 있더군요. 가만히 지켜봤는데 자기들끼리도 좀처럼 이야길 안해요. 몇몇 사람은 안면이 있었는데 대개 정보에 손꼽힌다는 친구들이었지요.
나중에 들어보니 그 중에서 2∼3명은 야간 당직 근무도 했대요. 얼마나 보안이 심했던지 직원 외에는 절대로 출입을 안 시켰고 경찰이나 다른 기관에서 무슨 집인가 탐문해도 개인집인걸로 위장했다는 거죠.』
이씨 주변인물들은 한결같이『사설 정보팀은 당정개혁을 위한 비밀사정작업이었다』며 그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의 순수성에 대해 의혹이 가는 대목도 몇가지 있다.
우선 이씨와 차 실장과의 비밀접촉이다. 이씨 측근들은『이 장군이 차 실장을 알게된 것은 사설 정보 활동 때부터』라고 말하고 있지만 경호실 소식통의 은밀한 증언에 따르면 이씨는 차 실장이 국화외무위원장이던 때부터 교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씨는 차 실장이 경호실장이 되자 한달에 한두번씩「쥐도 새도 모르게」청와대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경호실측은 보안을 위해 이씨 출입 때는 특별히 경호실 차량을 제공했다고 전해진다.
이-차 접촉 내용은 물론 베일에 싸여 있다. 하지만 증언을 묶어보면 차 실장도 이씨 정보팀 활동을 깊숙이 알고있었으며 조사 결과를 박 대통령과 공유하고 있었다는 냄새가 짙다.

<정보부장에 거론>
정보요원 Q씨의 증언.
『김재규 부장과 차 실장의 불화가 깊어진 데는 이씨 사설정보대 몫이 큽니다. 김 부장은 박 대통령에게 대충 중요한 것 만 보고했는데 차 실장은 이 장군으로부터 전해 받은 뒷조사 결과를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보고했어요. 그러니 보고 받는 사람으로서는 어느쪽을 더 신임했겠습니까.
10·26이 가까워질 때쯤 해서는 청와대주변에「정보부장이 이 장군으로 바뀌게돼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어요. 물론 김 부장 귀에도 들어갔죠. 김 부장이 10·26을 저지른 것도 이 부분과 관련이 없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거예요.』
「이-차 접촉」보다도 더욱 안개에 싸여있는 구석은 정보팀이 캐냈던「물건」의 행방이다. 정보요원들의 증언대로 당·정·군의 간판급 인사 20∼30명의 뒷조사 내용이라면 어마어마한 것이 많을 터인데 그 중요 문건이 10·26후 어떻게 처리됐느냐는 의문이다.
이 부분에서 몇몇의 민감한 시선은 이씨와 전두환 전 대통령간의 인척 관계에 쏠리는 것 같다. 정보요원 Z씨는『10·26후 권력공백상태에서 전 소장이 비교적 수월하게 권력을 움켜쥘 수 있었던 것은 처삼촌인 이 장군을 통해 구 정치세력의 약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같은 관측에 힘을 붙여주는 것은 10·26후 이씨와 전 장군간의 깊숙한 교류에 관한 증언이다. 한 이씨 측근은『12·12를 비롯해 중요한 사태발전에 관해 전 장군이 처삼촌인 이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더군다나 이씨는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정보부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이 문제도「전서방」(이씨 집안에서는 이렇게 부른다)과 협의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씨 측근 모씨는『이 장군은 어차피 전서방이 대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정보부장을 고사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또 다른 주변인물 Z씨의 이야기는 다르다.
그는『최대통령이 이 장군을 정보부장 시킨다는 이야기가 돌자 전장군 내외가 여의도 아파트로 이씨를 찾아와 간곡한 만류의 뜻을 전했고 이 때문에 이장군의 심기가 불편해진 적이 있다』며『며칠후 전장군의 정보부장 겸임발표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박·전대통령과의 인연도 인연이지만 현대 한국의 정치 비사속에서 이규광스토리는 훨씬 이전인 1공 이승만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보부나 보안사도 없던 시절 대령으로 헌병감에 올랐던 이씨의 파워는 막강했던 모양이다. 숙군 명단을 받아 쥔 이 대통령도『이 사람은 내 심복인데 좀 빼줄 수 없겠나』라며 이씨의 눈치를 살폈다고 한다.
숙군이 끝나고 이 장군에게는 파란과 곡절의 인생사가 시작된다.
60년 4·19 발포명령 시비에 한차례 휘말리고 61년 5·16을 20여일 앞두고는 장도영 총장에 의해 하극상 혐의로 군 영창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입열면 큰 파문">
5·16후 이씨는 박정희 소장 덕분에 풀려나지만 61년7월 예편하고 나서 63년3월엔 다시 「군일부 쿠데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는다. 박 대통령과의 묘한 은원 관계가 엮어지는 셈이다. 대부분의 반혁명사건이 그랬듯이 박 대통령은 65년말 병 보석으로 이씨를 풀어 주었고 이씨는 이후 세상의 후면에서 낭인처럼 지내다 다시 박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씨는 현재 한달에 20여일을 지방에서 보낸다. 부인 장씨는『이 장군은 세상일을 잊으려 낚시로 세월을 보낸다』고전했다. 이씨는 자신에 관해 일체 입을 열지 않는다.
측근을 통해 이씨는『세상에는 밝혀지는 것보다 묻혀지는 사연이 더 많은 법』이라고 했다. 부인 장씨를 비롯, 몇몇 측근들은 이씨에게『이철희·장영자 사건에 얽힌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밝힐 것은 밝히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했지만 이씨는『입을 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며 다시 지방으로 내려갔다.<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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