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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역사학자 홉스봄 '나의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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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미완의 시대

원제:Interesting Times

에릭 홉스봄 지음, 이희재 옮김

민음사, 690쪽, 2만5000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특히나 역사학자라면 더더욱. 이 책은 1917년에 태어난 석학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이다. 에릭 홉스봄은 근현대사 4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로도 유명한 역사학자다. '나 잘났다'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여느 자서전과는 맛이 다르다. 역사학자답게 개인사에 세계사를 접목시켰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서술 방식이 흥미롭다.

지은이는 "얼마나 격동기였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는 아이들에게는 정신없이 바뀌는 우표였다"는 식으로 유년기에 오스트리아에서 감지한 정치적 변동을 이야기한다. 그는 어머니가 친척에게 보낸 편지부터 신문 기사 등 개인적.역사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사료를 끌어 모았다. 독자 입장에서는 남의 일기장을 엿보는 재미에다 현대사의 흐름도 읽는 지적 호기심도 충족시킬 수 있어 여러 모로 즐겁다.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태어나 나치즘의 광풍, 소련의 붕괴 등을 지켜보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았기에 자서전은 그 자체로도 충실한 현대사가 된다.

지은이는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다. 자신이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에 지면을 상당부분 할애한다. 역사적 전환기인 30년대에 세계를 뒤흔들었던 파시즘을 무너뜨리기 위한 대안은 공산주의였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완벽하고 총체적인 지적 체계가 주는 미학적 매력, 피억압자에 대한 연민, 속물 근성에 대한 혐오감은 똑똑한 청년을 공산주의에 빨려들게 만들었단다. 그는 섹스의 절정보다 강렬한 대중 시위의 '집단 황홀경'에도 빠져들었다고 털어놓는다.

우리 나라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그러했듯, 당시에 좌익 사상은 지식인들을 흡수했다. 그러나 이론이 현실 세계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지은이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벌어진 만행을 당시엔 애써 평가절하했다고 고백한다. 공산주의 운동 및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각국의 미래도 소련의 존립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 여행에서 공산주의의 비극적인 모습을 보고 참담함을 느끼지만, 지은이는 사상을 버리지 않는다. 학자인 그에게 공산주의와 마르크시즘은 세상을 해석하는 틀이자 자본주의를 견제하고 보완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공산주의 체제 붕괴로 미국의 독무대가 되어버린 세계 정세를 우려한다. 미국은 자기 편에 서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몰아붙이고, 제국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고 싶은지, 혹은 자신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몰라 "본받을 만한 나라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제 'Interesting Times'처럼 흥미로운,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아온 노학자는 세 세기를 이끌어갈 독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며 자서전을 맺는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내려놓지 말자 (…)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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