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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다쳐 1년을 낑낑 그때 깨달았죠 난, 발레 없인 못 살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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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발레 올스타전'이라 불리는 '2007 세계 발레 스타 페스티벌'(25,2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러시아 볼쇼이.키로프,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 등 세계 최정상 발레단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화려한 무대다. 여기에 낯선 이가 한명 있으니 유니버설 발레단 소속의 하은지(23)씨다. 발레계에선 "연체 동물처럼 유연하다"란 소문이 자자할 만큼 이미 실력은 인정 받고 있지만 아직 수석 무용수도 아닌, 차세대 기대주일 뿐이다. 그가 발탁된 것은 비엔나 오페라 발레단의 다닐 심킨(20)이 "한국에선 꼭 하은지랑 파트너가 되고 싶다"며 강력하게 요청했기 때문. 과연 어떤 매력과 열정이 있기에 국내에서 활동 중인 무용수 중 유일하게 하씨가 '발레 올스타전'에 합류할 수 있었을까.

# 못 말리는 무용 영재

"다닐 심킨은 전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갈라 공연 때마다 자신의 파트너를 따로 데려가지 않고 현지의 발레리나와 함께 작업을 하는 스타일이에요. 저하곤 5년전부터 해외 콩쿠르에서 여러번 만난 사이구요. 한국에서 공연을 하니 자연스레 저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은데. 모르죠, 혹 한국에 아는 사람이 저 밖에 없을지도. 호호"

약간 혀 짧은 소리에 느릿느릿한 말솜씨. 툭 하면 터져 나오는 웃음. 하씨는 에두르거나 숨기지 않았다. 마치 아기처럼 자신의 얘기를 소탈하고 조근조근히 털어놓았다. 일반인이 자칫 발레리나에게 가질 수 있는 선입견,'좋은 집안에서 고생 모르고 자란 공주과'란 짐작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그는 서울예고 1년 시절 영재 케이스로 한국종합예술학교 무용원에 전격 입학할 만큼 일찍이 두각을 보였다. 그렇다면 혹시 집안에 무용가가? "아버지는 신발 사업하시고, 어머니는 그냥 평범한 주부예요. 굳이 꼽자면 이모 할머니의 아드님이 성악하셨다는 것 정도…." 한마디로 핏줄은 예술적 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발레를 시작했을까. "네다섯살 때부터 텔레비전에 음악이 나오면 무조건 따라 춤을 추곤 했어요. 그것도 주로 발라드 음악에 맞춰서요. 댄스 음악이 아닌 조용한 음악을 선호한 것을 보면 전 타고난 발레리나 아니었을까요." 그는 5학년 때 국립발레단 산하 발레 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발레리나의 길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싫어하셨단다. "발레를 하려면 차라리 피겨 스케이팅을 하지. 동작도 비슷비슷한데. 게다가 피켜 스케이팅은 금메달이라도 딸 수 있잖아"라고 말리시곤 했단다. 아무리 심각한 얘기라도 유쾌하게 받아 넘기는, 엉뚱한 면이 그에겐 많았다.

# 부상 악몽을 훌훌 털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 이후 그는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갔다. 2002년 잭슨 콩쿠르 특별상을 시작으로 룩셈부르크, 프라하, 동아 콩쿠르에서 연속 금상을 차지했다. 2003년 해외 투어 중엔 미국 네바다 발레단으로부터 전격적인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국제 무대로 진출하는 등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네바다 발레단 입단 4개월 만에 그녀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며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게 된다. "예전엔 발레가 힘들다고 투덜댔죠. 하지만 사고 이후엔 '영영 못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더욱 애착이 갔어요. 그때 깨달았죠. '아 난 발레 없인 못 사는구나'." 1년여의 재활 끝에 재기에 성공한 그는 이후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 착실히 자기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무용계에서 최고로 꼽는 그의 레퍼토리는 '에스메랄다'. 특히 탬버린을 오른손에 잡고 번쩍 든 채 오른쪽 다리를 그대로 올려 차는 '데벨로뻬'동작은 그의 전매 특허다. 최대 10회 이상 연속으로 성공시켜 관객의 탄성을 자아내곤 한다. "테크닉이 뭐 그리 중요한가요. 가슴으로 다가가야 감동이 큰 거겠죠. 저도 이젠 아픔을 겪었으니 '마음의 발레'가 뭔지 조금 알 것 같아요." 02-751-9682.

글=최민우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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