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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쉼] 헤쳐 모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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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로뇨에 가는 도중에 만난 고즈넉한 마을을 지나는 순례자들.

# 1 지친 인생, 잠시 STOP !

에스테야에서 로그로뇨까지는 29㎞. 이제껏 하루 여정 중 가장 길다. 내 느린 걸음과 게으름으로 이만한 거리를 가려면 적어도 10시간은 걸어야 한다. 맨 먼저 길을 나서 가장 늦게까지 걷는 수밖에 없다.

첫새벽에 동화처럼 예쁜 마을 에스테야의 알베르게를 빠져나오는데두 남자가 따라나선다. 멕시코 출신인 펠리페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스테판이다. 펠리페는 주비리에서 깜깜한 숲 속을 함께 헤맨 혈맹이었고, 스테판은 팜플로나 알베르게의 부엌에서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을 때 "당신을 피레네 오리존 산장에서 봤다고" 말을 건넨 붙임성 좋은 친구였다.

이곳 산티아고 길에서는 옛말인 '회자정리 이자필면(會者定離離者必面:만나면 헤어질 때가 있고 헤어진 사람도 다시 만날 때가 있다)'을 절감하게 된다. 팜플로나를 눈앞에 두고 떠나보낸 펠리페와, 팜플로나에서 만난 스테판을 한꺼번에 재회한 건 에스테야에서였다. 그 사이에 두 사람은 불알친구처럼 친해져 있었다.

피레네를 넘으면서 근육을 다친 펠리페는 며칠 만에 보니 더 절뚝거린다. 하지만 기필코 산티아고까지 완주해 멕시코 남자의 강인 함을 입증하겠다는 각오는 더 단단해져 있었다. 키도 크고 덩지도 좋아 빅맨으로 불리는 스테판은 보기와 달리 매사에 진지하고 학구적이었다. 날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즉시 일기를 쓰고, 노트에 적어 놓은 스페인어 단어 10개씩을 외는가 하면, 명상 수련에도깊은 관심을 보인다.

오전 6시30분. 마을을 벗어나면서 아쉬움에 뒤돌아본다. 저 멀리 산타마리아 성당 지붕 위로 눈썹 같은 초승달이 걸렸고, 매혹적인 다크블루빛 하늘에는 뭇별이 반짝인다.

어둠이 짙은 길 위에는 세 사람의 그림자만 흔들린다. 성도 나이도 국적도 직업도 다른 우리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인생길에서 잠시 브레이크 타임 을 갖는 중이라는 것. 펠리페는 변호사인 부인과 오랜 별거 끝에 법적 이혼절차에 들어갔고, 스테판은 몇년 동안 다닌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이참에 아예 직업을 전환할까 고민 중이었다. 인생 전반전을 일중독자로 죽자 살자 뛰다가 기진맥진한 나는 후반전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답을 구하는 중이고. 우리 모두는 길 위에서 길을 찾는 인생길의 순례자들이었다.

# 2 나만의 노래를 찾아서

여왕 복식 차림으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고 돈도 받는 로그로뇨의 여인.

이사벨을 만난 건 29㎞ 여정의 중간쯤 되는 호젓한 산길에서였다. 눈부신 은발에 보기 좋을 만큼 통통한 그녀는 나를 보자 알은 체를 한다. 진작부터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노라고, 당신은 늘 즐겁고 젊게 사는 것 같은데, 자기는 이제 스물아홉인데도 무척 우울하고 마음이 늙었단다. 나도 그 나이 땐 마찬가지였다고 말해 주었다. 실제로 내 젊은 날은 청년기 특유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자기 혐오에 유신이라는 시대상황이 겹치면서 얼마나 황폐하고 암울했던가.

캐나다 퀘벡에서 왔다는 그녀는 팝싱어란다. 어려서부터 소원이던 가수가 됐고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면서 공연도 많이 했단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대중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유행이나 좇는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됐더란다. 순례를 떠나온 것도 자기가 진정 부르고 싶은, 자기만의 노래를 내면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라나. 그 간절함과 진지함으로 미루어 이 길에서 '이사벨만의 노래' 를 찾게 되겠지.

에스테야 가는 길에 만난 목동을 따라가는 양떼들.

갈수록 포도밭이 많아진다. '와인의 수도' 로그로뇨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지친 그녀와 나는 저 멀리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뵈는 산비탈 포도밭에 무거운 배낭을 잠시 내려놓았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는데 산들바람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핥는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콤한 오수에 빠져들었다.

# 3 포도 축제 … 순례자들 번개 모임

강물이 바다에서 한데 만나듯, 각자의 행군 속도와 취향에 따라 이 마을 저 마을로 흩어졌던 순례자들도 큰 도시에서는 합류하게 된다. 알베르게는 규모가 큰 데다, 볼거리도 많고, 쇼핑을 맘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그로뇨에서는 때마침 포도 수확철을 맞아 '포도 축제'가 일주일 동안 대대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로그로뇨 입구 표지석에 순례자들이 놓고 간 돌들.

알베르게에 여장을 푼 순례자들은 하나 둘 시내 중심가로 진출했다. 먹거리도, 볼거리도, 아름답고 오래된 성당도 다 그곳에 있었으므로. 이사벨과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간단히 요기하면서 한잔할 요량으로 우리나라 명동 같은 시내 중심가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펠리페.스테판을 위시해서 낯익은 얼굴이 잇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자연스레 순례자들의 로그로뇨 번개모임이 이뤄졌다.

먼저 독일 청년 로자. 유니폼처럼 등산복 차림 일색인 순례자들 사이에서 단연 튀는 옷차림에 귀걸이 코걸이까지 했다. 헐렁한 윗도리는 인도네시아, 알라딘풍의 바지는 인도, 머리에 두른 터번은 파키스탄산. 복장이 말해주듯이 지구촌, 특히 아시아를 주로 돌아다녔단다.

그 옆에 앉은 통통한 몸집의 사내는 프랑스인 구르몽. 제법 규모가 큰 투자회사에서 부하직원 70명을 지휘하는 마케팅 담당 매니저다. 사람을 다루고 관리하는 일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낀 나머지 회사에 한 달 휴가를 내서 '스톱(stop)' 중이란다. 탈진한 자신에게 휴식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그의 용기와 긴 휴식을 허용한 회사의 배려가 다 부럽다.

좌중에서 가장 어린 제이콥은 폴란드계 독일인. 형과 함께 길을 떠나왔다. 범생이어서 법대에 진학한 형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말썽꾸러기였단다. 고교 시절 마약에 취해 고층 빌딩에서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린 적도 있을 만큼. 고향에 레스토랑을 내는 게 꿈이라는 그는 훗날 자기 가게에 오면 포도주를 공짜로 대접하겠단다.

성격이 활달한 미국 여성 재닛도 빠지지 않았다. 주비리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2년 동안 한국의 외국인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쳤던 경력의 소유자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대뜸 "오우, 아줌마!"라고 놀려댔다. 힘들 때마다 지나가는 차에다 대고 "아저씨, 산티아고 가주세요" 라는 웃기는 멘트를 날리고, 뜨거운 찜질방에서 마시던 찬 식혜를 못내 그리워했다.

분위기 메이커는 단연 벤이었다. 호주에서 온 그는 화가 로트레크처럼 하체가 기형적으로 짧았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 무릎 위에서 흔들거리다가 떨어져 목을 다쳤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난 까부는 걸 멈추지 않았다"고 웃는다. 지금은 쿨(cool)하게 말하지만, 이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는 깊고 외로운 고통의 강을 건넜을 것이다.

주흥이 도도해지자 벤은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흥겨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깨에 늘 작은 북을 둘러메고 다니는 로자가 경쾌한 반주를, 가수 이사벨이 코러스를 넣는다. 나머지는 백댄서. 축제를 즐기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정작 축제 행렬보다 순례자들의 즉석 공연에 더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허나 우리는 아쉬움 속에 축제의 밤을 끝내야만 했다. 밤 10시만 되면 문을 닫아 거는 알베르게의 엄격한 규칙 때문이었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만 새벽부터 길을 떠날 수 있기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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