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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남편생활백서] 자업자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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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TV는 안방으로 들이고 거실에는 책장을 내는 게 좋겠어."

둘째 유겸이와 함께 TV에 빠져 낄낄대고 있는 내 모습을 노려보던 아내가 혀를 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TV를 본다.

"그러면 아이들이 TV를 적게 본대."

"그래?"

"응. 대신 책을 많이 읽는다더라. 아이들도 처음엔 불편해하지만 곧 익숙해지고 좋아한대."

가만, 그 이야기는 얼마 전에 내가 아내에게 한 말이 아닌가. 그때 아내의 반응은 말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시큰둥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아내는 남편이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 믿고 안 믿고는 둘째 치고 아예 듣지도 않는다. 만약 들었다 해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전에 내가 말했을 때 아내는 높은 책장이 거실에 나와 있으면 답답할 거라며 반대했다. 아내가 했던 말을 나는 아내에게 돌려준다.

"책장이 높아서 거실이 답답하지 않을까?"

"어차피 책장을 놓아도 두 면만 쓸 건데 괜찮아."

가만, 그렇게 말한 것 역시 나였는데. 대화의 내용은 같지만 말하는 사람이 뒤바뀐 것이다.

"무슨 바람이야? 전에 내가 말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당신이 언제? TV 좋아하는 사람이 TV 넣자는 말을 어련히 했겠다."

"안방에서 아주 껴안고 살려고 그랬다 왜?"

아내는 남편이 하는 말은 믿지도 듣지도 않지만 자기 사무실 동료나 노조 동지가 한 말은 잘 믿는다. 아내가 무슨 대단한 뉴스인 것처럼 내게 와서 말하는 것들은 이미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가 핀잔만 들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누가 말한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어쨌든 책장을 거실로 옮겨야 해."

''어쨌든'이라니. 난 그게 중요하단 말이야'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참는다. 부모의 대화가 점점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유겸이는 슬그머니 일어난다.

"어디 가느냐?"

"계획표 짜려고요.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공부할 때 먼저 계획표를 짜는 게 중요하대요."

내 말을 듣지 않는 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말도 아빠가 하면 귀부터 막지만 선생님이나 친구가 하면 '완전 소중'하게 듣고 따른다. 계획표 이야기만 해도 아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내가 했던 말이다.

"내가 그렇게 말할 땐 안 듣더니."

"언제 그러셨어요? 또 그게 뭐 중요해요? 아무튼 전 계획표 짤래요."

''아무튼'이라니. 아빠는 그게 중요하단 말이야'라고 울부짖고 싶지만 나는 가까스로 참는다. 이 집에선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문득 이 세상에 나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대통령처럼 고독하다. 언제나 난 혼자야.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아. 내 말도 말인데 왜 내 말은 안 듣는 거지. 똑같은 말도 왜 내가 하면 안 받아들이는 걸까.

대통령만큼이나 고독한 남편은 계속 TV를 본다. TV에 빠져 있는 남편에게 아내가 무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남편은 TV 볼륨을 높인다. 아내는 소리를 지르지만 남편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내가 TV를 끈다. 그제야 남편은 아내를 돌아본다.

"빨리 책장 안 옮기고 뭐 해요?"

어쩌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아내와 아이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아닐까.

김상득 듀오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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