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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과 야마구치 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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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판사들이 대법원장의 세금 탈루나 전별금 논란을 검찰의 복수로 여기는 모양이다. 법원의 잦은 영장기각에 앙심을 품고 대법원장을 표적 삼아 음해 정보를 흘린다는 것이다. 법원과 검찰의 집안싸움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들 자유다. 다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 지금 법원은 국민의 눈에 손가락질 받는 이미지로 비치고 있다. 누가 이런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싶고, 누가 그 판결에 흔쾌히 승복하겠는가.

'일본 최고 재판소 이야기'(야마모토 유지(山本祐司) 지음)를 보면 일본 사법부의 최대 혼란기는 패전 직후인 1945 ~ 48년이었다. 새로운 지배자인 맥아더 사령부는 '판사들은 옛 군부 파쇼의 하수인'이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책은 혼란기에 눈여겨볼 두 명의 판사를 소개한다. 한 명은 거물 판사인 호소노 조료(細野長良)이고, 또 한 명은 33세인 무명의 야마구치 요시타다(山口良忠) 판사다.

일본 판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호소노를 대법원장으로 밀었다. 그는 군부 파쇼에 저항한 유일한 판사였다. 사법부 독립에도 적극적이었다. 호소노는 자신의 과거를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군부독재에 저항했을 때 당신은 무엇했는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우리 대법원장의 "독재정권 때 법정에서 노래 부르고 신발을 벗어 던지던 사람들이 지금 국정을 움직이고 있다"는 발언과 닮았다. 일본 판사들은 호소노의 독선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외톨이가 된 호소노는 결국 쓸쓸하게 퇴장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 사법부를 구원한 인물은 오히려 야마구치였다. 그는 도쿄지법에서 식량통제법 위반사건을 전담해온 평판사였다. 당시 일본은 엄청난 식량난에 시달렸다. 쌀 생산량이 전쟁 전의 절반으로 뚝 떨어지면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강력한 식량통제법을 실시해 성인의 하루 배급량을 300g으로 제한했다(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과 똑같은 수준이다). 쌀 암시장이 기승을 부렸다. 식량통제법으로 단속되는 사람만 매년 120만 명을 넘었다. "정직한 사람은 모두 죽거나 교도소에 갔다"는 말이 나돌았다.

야마구치 판사는 재판을 마치고 나오다 계단에서 쓰러졌다. 그러고는 극심한 영양실조로 숨졌다. 유서 대신 남긴 병상일기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식량통제법은 국민을 굶어 죽이는 악법이다. 그래도 법률인데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판사인 내가 암시장 쌀에 입을 댄다면 어떻게 피고들을 심판할 수 있겠나. 차라리 식량통제법 아래 행복하게 굶어 죽을 생각이다…." 야마구치는 끝내 배급 쌀로 버티다 죽음을 선택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맥아더 사령부는 대법원장을 총리와 동격으로 끌어올려 명실상부한 사법부 독립을 뒷받침했고 법관의 처우도 대폭 개선했다.

(참고로, 당시 도쿄고교의 가메오 에이시로(龜尾榮四郞) 교사도 마찬가지다. 그는 "학생들에게 바르게 살라 하면서 나 스스로 불법을 저지를 수 없다"며 굶주림을 선택했다. 그의 아사는 일본 교사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존경을 회복시킨 결정적인 계기로 평가받는다.)

모쪼록 우리 대법원장의 결백 주장이 사실로 입증됐으면 한다. 임기까지 보장된 대법원장이 중도에 물러나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 서민과 눈물을 함께하는 대법원장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전관예우를 바로잡겠다"느니 "10원이라도 탈세했으면 옷을 벗겠다"는 발언부터 민망하다. "아무리 법률지식이 뛰어나도 도덕성과 청렴성을 의심받게 된다면 법관 자격이 없다"는 발언도 누구 들으라고 한 소리인지 모르겠다.

호소노가 퇴진했다고 일본 사법부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야마구치라는 젊은 판사의 올바른 처신이 일본 사법부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런 점에서 "사법부 수장이 무너지면 사법부 전체가 무너진다"는 대법원 간부들의 육탄방어는 자제됐으면 좋겠다. "국민을 섬기겠다"느니 "국민의 이름으로 판결하겠다"는 포퓰리즘적 발언도 더 이상 듣기 거북하다. 국민은 말없이, 아무리 나쁜 법이라도 목숨을 걸고 그 법을 지키는, 야마구치 같은 판사에게 가슴 먹먹한 감동을 받게 마련이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