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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만들기] 49. 올림픽 상징조형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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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개발도상국인 한국의 수도 서울이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올림픽을 치른다는 것은 벅차고 힘겨운 일이었다. 그만큼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과잉투자의 사례도 있었다. 평화의 문과 올림픽대교가 대표적이다. 올림픽공원 입구에 있는 평화의 문은 1984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기념하는 상징조형물을 만들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졌다.

85년 9월 실시된 평화의 문 설계 공모에서 건축가 김중업씨의 작품이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金씨의 작품은 조형물이 세워질 1만여평의 부지에 절 입구의 일주문과 우리나라 전통 건축양식의 지붕선을 살린 대문 모양이었다. 크게 두개의 기둥과 지붕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대칭을 이루는 형태였다. 지붕은 높이 24m에 너비 70m의 철골트러스 및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기둥은 가로 3.5m, 세로 36.8m로 흰색과 청색을 번갈아 붙여 줄무늬 모양을 이루도록 했다. 우수작으로 선정된 조각가 김세중씨의 작품은 88m의 원기둥 다섯개를 반원형으로 돌리고 그 앞에 지구 모양의 둥근 구조물을 배치한 것이었다. 그런데 심사 결과가 대통령에게 보고되기도 전에 언론에 크게 보도되는 바람에 서울시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여기에 당선작에 대해 '상징성이 약하다''기념비적인 성격이 뚜렷하지 않다'는 등의 비판도 드셌다. '상징성이 약하다'는 비판은 결국 작품의 규모가 작다는 것이었다. 김중업씨가 "국보 1호인 남대문의 세배 규모가 작은 거냐"고 반론을 폈지만 통하지 않았다. 결국 85년 10월 상징조형물 건립위원회는 두 개의 당선작을 백지화하고 김중업.김세중씨에게 합작품을 내도록 의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두 작가는 서로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합작은 곤란하다며 거부했다. 김세중씨는 "이와 관련해 다시는 찾지 말아 달라"며 상징조형물 건립위원회 회의 도중 나가버렸다. 이에 따라 공모 당선작 발표 후 두달여가 지난 85년 12월 말 김중업씨의 원래 작품을 수정한 작품이 채택됐다. 이 작품은 당초 작품보다 전체적인 규모를 약 4배로 늘려 문 높이.너비를 각각 91m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형물이 너무 커 안전성 등에 문제가 많다는 비판이 제기돼 다시 높이 32m, 너비 45m로 축소된 뒤 건립 공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1년 가까이 공사가 진행됐을 때 다시 맨처음 설계대로 높이를 24m로 낮추라는 주문이 김중업에게 전달됐다. 이에 김중업씨는 크게 반발하곤 다시는 공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중업씨는 평화의 문 준공을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올림픽 상징조형이 그의 생명을 크게 단축시켰다고 생각했다.

광진구 구의동과 송파구 풍납동을 연결하는 올림픽대교의 건설은 올림픽을 대비한 도로교통 정비사업의 하나였다. 서울시 지명위원회가 지은 올림픽대교의 원래 이름은 강동대교였다. 그런데 보고를 받은 全대통령이 올림픽대교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현상 공모를 통해 삼우기술단의 'PC사장교'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강판을 전혀 쓰지 않는 순수 콘크리트 다리로 여러 가닥의 강선이 상판을 지탱토록 설계한 것이였다. 올림픽대교 시공 과정에서 홍수 때 안전성 문제 등의 시비가 벌어졌다. 공법 변경을 둘러싸고 토목학회의 내분으로까지 번졌다. 이로 인해 88년 6월 완공 목표였던 올림픽대교는 올림픽이 끝난 89년 말 개통됐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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