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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감독〃지휘봉 왕년의 두 스타플레이어|남자팀 조련에 농구인생 걸겠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반드시 명감독이 되지는 않는다」. 스포츠계에서는 이 말이 보편화되어 있으나 최근 들어 국내스포츠계에서는 선수에 이어 감독으로서도 성가를 높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프로야구 LG의 백인천(백인천) 감독, 프로축구의 이회택(이회택) 포철감독·차범근(차범근) 현대감독, 배구의 진준택(진준택) 고려증권감독 등은 현역 때처럼 감독으로서도 성공한 사례다. 60∼70년대에 아시아농구의 최고스타였던 신동파(신동파) 감독이 SBS (서울방송) 남자팀의 창단감독을 맡게돼 관심이 쏠리고 있으며 축구국가대표 골게터였던 박수덕(박수덕)영남대 감독은 성인아마대회의 최고봉인 대통령배대회에서 우승, 지도자로서 각광받고 있다.
한국 남자농구의 대명사로 불리며 태평양화학 여자농구단을 10년간 무적함대로 이끌어온 신동파(신동파·47·사진) 감독이 돌연 서울방송(SBS) 남자팀 창단감독으로 변신, 또 다시 관심의 표적이 되고있다.
지난60년대에 한국은 물론 아시아무대를 풍미한 신 감독은 농구를 위해 태어났다는 얘기를 듣는다.
함경남도 안변군 안변읍 과남리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어머니 품에 안겨 월남, 춘천을 거쳐 서울에 정착한 부모를 따라왔기 때문에 서울토박이나 마찬가지.
지금은 없어진 수송(수송)국교시절 스코어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중계방송을 들을 정도로 야구를 좋아했던 그는 당연히 동네골목야구의 주장노릇을 도맡았다.
휘문중에 입학하자 야구부에 입문, 야구선수로의 꿈을 키우던 그는 『키만 컸지 체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팀에서 쫓겨나자 실의 속에 농구부입문 권유를 받아들였다.
타의에 의해 농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어린시절 지금 생각하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은인이 된 그를 내쫓았던 야구부 감독 선생님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부음(부음)을 듣고서도 애석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무튼 휘문고에 진학하면서 키가 10cm가까이 더 자라 1m80cm를 넘게된 그는 신봉호 (신봉호) 코치의 집중지도로 원 핸드슛을 터득, 골게터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연·고대의 치열한 스카우트경쟁 속에 그는 연세대를 선택, 김영일(김영일) 하의건(하의건) 방렬(방렬) 김인건(김인건) 등 내로라 하는 선배들과 함께 1학년때부터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는 고3때 이미 상비군에 뽑혔고 대학진학과 함께 대표선수로 발탁돼 두 차례의 올림픽(64,68년)을 비롯, 여섯차례의 아시아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유니버시아드에 각각 두 차례, 세계선수권대회(71년)에 한차례 출전해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명성을 떨치며 한국농구를 아시아 정상에 올려놓았었다.
기업은 코치직을 75년 1년만에 물러난 그는 곧바로 태평양화학의 창단감독을 맡아10개월만에 여자부 정상에 올려놓은 것을 비롯, 78년 박찬숙(박찬숙)을 스카우트해 전무후무한 36연승기록을 세우면서 무적함대로 이끌었다.
현역생활을 마감한지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시아권에서 가장 먼저 농구가 도입됐고 또 성행했던 필리핀에서의 그의 인기는 가위 절대적이다.
69년 제7회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혼자 50득점을 올리며 필리핀을 제압하고 한국이 우승을 차지한 순간 신동파는 한국이 아닌 필리핀에서 「영웅」이 되어버렸던 것. 필리핀TV는 이 경기의 녹화테이프를 이후 세 차례나 방송하면서 신씨는 농구를 국기로 하는 필리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됐다.
경기도중 멋진 슛이 성공하면 「클린 슛」이라는 말 대신 신동파의 끝자인 「파」라고 소리지르는 등 감탄사가 일반화됐다. 또 골프장에서도 볼이 홀 컵에 들어가면 「파」라고 소리지를 정도로 신격화됐다.
76년 여자대표팀코치로 발탁된 이래 80년에 감독으로 승격됐고 네 차례의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78, 80, 82, 88년), 방콕아시안게임(78년) 뉴델리아시안게임(82년) 준우승, 서울올림픽 7위를 이끌어냈다.
아무튼 여자팀 전문감독이던 신 감독이 「꿈에 그리던」, 그리고 「마지막 남은 농구인생을 걸게되는」(본인의 표현) 신생 남자팀의 사령탑을 맡았다. 『한마디로 신선한 농구를 펼쳐 보이고 싶습니다. 우선 인화를 첫째 목표로 삼고 차돌보다 더 단단한 팀웍을 갖추는데 중점을 둘 생각입니다. 그래서 지더라도 팀 전체가 똘똘 뭉쳐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팀을 만들겠습니다.』
그는 요즘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신동파」라는 자신의 이름보다 「서울방송」이라는 팀의 이미지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71년 결혼, 이연일 (이연일·46) 씨와의 슬하에 혜정(혜정·20) 수정(수정·15) 주용(주용·14) 등 1남2녀를 두고 있다. <김인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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