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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문학 투쟁일변 궤도수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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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봄 들어 장편 노동소설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최근 김정환씨의 『그 후』(민맥)를 비롯, 안재성씨의 『사랑의 조건 』(한길사), 정화진씨의 『철강지대』, 이수광씨의 『홍도화』등이 출간됐다. 이 작품들은 노동 현장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기업가·노동자의 이분법아래 노동자의 시각으로 투쟁일변도로 나가는 이전의 노동소설과는 달리 남녀간의 사랑이 배경에 깔리는 등 창백한 이념보다 인간성에 뿌리를 둔 노동운동을 그리고 있어 90년대 노동소설의 방향을 가늠케 해주고 있다.
김정환씨가 전3권 예정으로 현재 2권까지 펴낸 『그 후』는 작년 현대중공업 노사분규 직후부터 최근까지의 사회·노동·경제계의 흐름을 다루고 있다. 김씨는 이 작품에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대학출신의 남녀 노동운동가·대학생·검사·기업체 간부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통해 노동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지배계급 내부에서의 미묘한 갈등 등 6·29이후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대학출신 노동가와 여공, 또 현대중공업 노동자와 여대생 등의 사랑을 이야기의 큰 줄거리로 잡음으로써 계층간의 갈등을 껴안으며 노동현장의 딱딱한 이야기에서 벗어나고 있다.
장편 『파업』으로 제2회 전태일 문학상을 받으며 노동소설을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려놓았던 안재성씨의 새 장편소설 『사랑의 조건』의 주제도 남녀 사이의 사랑. 학생운동을 하다 수감된 상태에서 뜨거운 동지애를 넘어 사랑을 느끼게된 남녀의 사랑과 함께 현장활동가로서 그들을 그림으로써 사랑과 사회변혁을 맞물리고 있다.
87년 단편 「쇠물처럼」을 시작으로 잇따라 「규찰을 서며」 「겨울일기」등의 작품을 발표, 노동자의 전형을 모색했던 정화진씨의 첫 장편 『철강지대』도 대기업과 전자업체에서 각각 일하는 한 쌍의 남녀가 주인공. 이 주인공들의 사람을 큰 줄거리로 하여 각층의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 그 구조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전형을 그리고 있다.
한편 『홍도화』는 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 돼 문단에 나온 이수광씨의 최초의 노동소설.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조합 총무부장·사무장 등을 맡았던 이씨의 이번 소설은 보조미싱사와 견습목공의 사랑을 기둥줄거리로 노조탄압·학생운동 등 70∼80년대 노동계층의 삶을 그리고 있다.
노동자의 삶이 소설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부터. 황석영씨의 『객지』, 조세희씨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등이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도시빈민 등의 삶을 그리면서부터다. 그러다 80년대 후반 민주화추세와 노동운동에 힘입어 전문작가, 혹은 노동자출신 작가들에 의해 노동소설이 쏟아지면서 본격노동소설의 강을 열게 됐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들어 꽃피기 시작한 노동소설들은 대부분 중·단편에 머물러 총체적 노동·사회상을 담아낼 수 없었고 또 노동자와 사용자간의 확실한 대립 위에 투쟁일변도로 나가는 선진노동자상만 그려 오히려 노동자 일반과 멀어진 면이 없지 않았다는 비만도 일어났다.
이념으로 뭉쳐진 동지애적·혁명적 모습에만 집착하다 문학적 감동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반성이 생겨났다.
소설이 사회과학적 이론을 그대로 담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고 인간내면의 추구와 그를 통한 갈등극복의 감동을 얻는 문학형식임을 다시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최근 노동소설의 이 같은 변화는 연시 등 구호차원을 벗어난 서정성을 담은 노동시들의 등장과 일맥상통한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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