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8)|<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13)|탈출 카운트다운|이용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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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중국인 이발사 천바이랑이 자기들 「인민해방군」에 많은 조선 동지가 있다는 말은 나에게 크나큰 흥분이고 충격이었다.
이 부근의 산야는 「인민해방군」이라는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의 활동 무대인 것을 나는 그후에야 알게 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천바이랑은 나의 탈출을 돕겠다고 나섰으니 무슨 틀림이 있겠는가.
나는 백만 대군을 얻은 행운아였다. 그러나 나는 조선범사들에게 기밀이 누설될까봐 아직 말을 못했다. 오늘은 천바이랑과 접선하는 날이다.
장소는 내가 보초를 서게 돼있는 신병교육대의 서문 외곽 망루대였다. 새벽 4시였다. 인민해방군에는 극도로 총이 부족하다는 그의 말을 나는 잊지 않았었다.
그들은 총 두자루로 1개 분대를 편성하여 유격전에 나가면 보통 총 5자루를 노획할 수 있고 5자루로 다시 1개 소대를 편성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불어난 것이 지금의 모택동군이다.
나는 보초 근무에 나가기 전 잠들어 있는 다른 내무반에 가서 총 두 자루를 홈쳐 망루대 밑에 숨겼다. 그리고 보초 근무를 교대한 후 총 개머리판으로 땅을 두들겼다. 망루대 담벼락에 숨어 있을 천바이랑에게 보내는 신호인 것이다.
아무 대답이 없어 나는 불안해하고 있는데 한시간이나 지나서야 망루대 밑에서 『어서 가자, 어서 가자』 라는 암호가가 들어왔다.
나는 『시간도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우리 조선 사람 9명이 다같이 탈출하겠으니 도와주시오』라고 했다.
평양을 출발할 때는 수십명이던 것이 중국 땅에 도착한 후 타부대로 나둬지는 바람에 지금 오카모토 (강본) 교육부대에 남아 있는 조선 사람은 나를 합쳐 9명. 그들은 언제라도 나와 같이 탈출하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며 내 눈치만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천바이랑은 『성 외곽에 있는 일본군 보초선을 돌파하기에 9명은 위험하다』면서 2개조로 나누어 가자는 것이었다.
즉 한조가 먼저 떠나고 며칠 후 다시 나머지가 떠나고….
그러나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몇사람이 탈출하면 나머지는 감시가 심해 빠져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 못 빠져 나갈 정도가 아니라 나머지는 즉시 영창에 갇힐 것이 뻔했다.
내 말을 들은 천바이랑은 한참 만에야 『그럼 이렇게 하자. 머지 않아 당신들은 밖에 나가 야간 연습을 하는데 그날 밤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산에서 하룻밤을 잤다. 금년에도 틀림없이 산에서 잘 것이다. 그러니 그때 9명이 한꺼번에 탈출하라. 야간 연습 날짜는 오카모토 대장실에 걸려 있는 「신병 교육 계획표」에 적혀 있으니 그것은 이동지가 알아낸 다음 이발할 때 나에게 말하라. 그 다음 일은 우리가 다하겠다. 안내는 물론이고 만일의 경우 놈들이 추격해 오더라도 우리가 처치하겠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하는 천바이랑이었다.
그것은 이발할 때의 말투가 아니라 지휘관이 부하에게 내리는 명령이었다. 역시 그는 이발사로 가장한 군인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야간 연습 날짜는 꼭 내가 탐지했다가 다음 이발할 때 알리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약속하고 홈쳐온 총 두자루를 그에게 건네주면서 「인민 해방군」에 있는 우리 조선동지들에게 『곧 만나자』는 안부를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종이 뭉치를 하나 던져주면서 『이동지도 이것을 한번 읽어보시오. 「조선 동포에게 고하는 격려문」이오』라는 것이다.
그는 어느덧 나를 『라오 이 (노이=이형)』라고 부르지 않고 『이 동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동지」란 같은 목표를 향해 생사를 함께 하는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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