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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한 일본 지자체 유바리 시 가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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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침몰하는 배에서 승객들이 서로 탈출하려는 상황이 지금 유바리(夕張)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주 일본 홋카이도 중부의 유바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시(市)의 살림이 거덜나고 시민들이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된 판에 달리 선택이 있겠느냐는 반문도 있었다. 올 6월 일본 지자체로 14년 만에 파산을 선언한 유바리시의 누적 적자는 360억 엔. 시민 한 사람(인구 1만3000명)당 280만 엔 가까이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시 당국의 목표대로 20년 동안 빚을 갚아 나가기 위해서는 막대한 고통 분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파산의 여파는 이미 시민들의 생활 구석구석에 파고들고 있다. 시 인구의 40%에 이르는 고령자들에게는 의료서비스 축소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유일한 종합병원인 시립 병원은 외과.산부인과.소아과.이비인후과 등의 진료를 이미 중단했다. 내년부터는 의료진과 병상 수를 대폭 줄여 '병원'이 아닌 '진료소'로 격하된다. 가장 큰 걱정은 응급의료체제다. 야간 당직을 계속 운영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소방본부에서 운영하던 구급차도 내년부터 4대에서 2대로 줄어든다.

55년째 여기서 살고 있는 전직 광부 아라이 료헤이(新井良平)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노인들은 병원이 없는 곳에선 살기 힘들다"며 "이웃 사람이 짐을 싸서 도회지의 자녀들과 합류키로 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탈출 대열에는 공무원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주 마감한 조기퇴직 신청에서 전체의 3분의 1인 99명이 퇴직원을 냈다. 급여가 내년부터는 30% 삭감될 뿐 아니라 퇴직금도 해마다 줄어들어 2010년까지 버티다간 지금의 4분의 1밖에 못 받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건축.소방.유치원교사 등 자격증이 필요한 전문 인력의 퇴직이 많아 시민들은 행정서비스의 공백을 우려하고 있다.

시립 보육원에 세 살 난 딸을 보내고 있는 나카가와 아키히코(中川昭彦)는 "지금까진 보육료로 한 달에 5000엔을 냈지만 내년부터는 3배 가까이 오르게 됐다"며 "인근 대도시인 삿포로로 나가는 것을 고려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내년 4월부터는 주민세와 자동차세, 하수도 요금이 오르고 지금까지 무료였던 쓰레기 수거료도 부담해야 한다. 아라이는 "시내버스 경로우대도 폐지되는 바람에 시청에 한 번 다녀오는 데도 왕복 1400엔이 들게 됐다"며 "지금 살고 있는 시영주택의 임대료도 언젠가는 인상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재 초등학교 7개와 중학교 4개를 2008년부터 1개씩만 남기고 단계적으로 통폐합하는 것도 걱정거리다. 유바리 남쪽 끝인 다키노우에에서 멜론 농사를 짓고 있는 나가누마 데쓰아키(永沼哲明)는 "초등학생 딸이 앞으로 20~30분씩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문화생활은 사치에 가깝다. 작은 마을 유바리를 유명하게 만든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는 올 2월 17회를 끝으로 존폐 기로에 서 있다. 시립 도서관과 미술관도 이미 문을 닫았다. 미술관은 소장품 1000여 점의 매각처를 물색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유바리=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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