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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새로 읽는 고전>|「마음」에 가치두는불교 길잡이|서산대사의 『선가귀감』-김성동(소설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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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난 것도 아니며 죽음도 없었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물건이란 무엇인고? 옛 어른이 송(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뚜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늘 가섭이 전할손가.>
언제나 고통스럽고 알 수 없는 것은 죽음의 문제였고「나」라는 근원의 존재였으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 확실한 까닭을 알고 난 다음부터였다. 국민학교 5학년때부터 비롯하여 닥치는대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첫 장을 열자마자 그만 눈 앞이 아득해지는 책과 만나게 되었다. 도무지 처음 보는 말이었고 전혀 그 이치를 헤아려볼 길이 없는 글이었다. 그 이름만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청허당(청허당)서산대사(서산대사)의 글이었다. 스님께서는, 그리고 또 이렇게 묻고 계셨다. 먼저 한 동그라미, 곧 일원상(일원상)을 그려 보이고 나서,

<삼교(삼교)의 성인(성인)들이 모두 이 말에서 나왔느니라. 뉘라서 말하여 볼 사람이 있으랴? 눈썹이 빠질라!>
아득하였다. 아득하고 또 아득하여 다만 눈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막막한 허공이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한글 선학(선학)간행회」에서 단기 4281년에 찍어낸『선가귀감(선가귀감)』이었다. 내가 비록 유년시절부터『맹자』까지 읽었다고는 하나 아직 문리가 터지기 전이었던 만큼 할머니께서 보시다가 책롱 속에 넣어두신 언해본 『선가귀감』이야말로 나의 좋은 「독서거리」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흰 종이 위에 먹물이 찍혀진 것이라면 하다못해 콩나물 한 주먹을 싸온 저자의 신문지 쪼가리까지도 남김 없이 읽고 또 읽었으므로 언제나 읽을 것이 모자라 목 말라하곤 하였다. 언제나 마음놓고 읽고 싶은 책들을 읽어 보는게 꿈이었다. 아니, 책은 많았다. 옛 고향에서의 우리 집에는 별당채 하나가 온통 서고(서고)였었다는 것을 할아버지께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남부여대하고 쫓기듯 대처로 이사한 다음에도 아직 많은 양의 서책들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나의 실력으로 읽어볼 수 있는 것은 기껏 윗대 할머니들의 궁체 서간문이거나 한글로 된 성경책과 찬미가 정도가 고작이었고,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만나게된 것이 『선가귀감』이었던 것이다. 인연이었다.
두루 알다시피 이 책은 서산스님이 대강경과 역대의 조사어록(조사어녹) 가운데 요긴한 것만을 추려 모아 주해를 달고 평(평)과 송(송)을 덧붙인 것으로 참선하는 납자들이 「거북통과 거울」로 삼는 책이다. 내가 다만 아득하고 또 막막한 심정으로 펼쳐보게 되었던 이 책은 한문으로 된 원글에 한글로 토를 달고 국한문 혼용으로 주해와 평석(평석)을 덧붙인 부휴선수(부휴선수)대사 교정본이다. 오뉴월에도 버선을 벗지 않는 완고한 유생으로 집안에 방포(방포)와 무격의 출입을 금하셨던 할아버지께서 할머니의 절 출입을 막지 않으셨던 것은 아마도 장차 두 자식을 생으로 잃는 끔찍한 사변을 겪고 난 다음부터였을 것이다. 한산 이씨(한산 이씨)이부사댁 (이부사댁)의 고명 따님이셨던 할머니께서 절 출입을 하셨던 것은 무슨 돈독한 불심(불심)이 계셨기 때문이라기보다 당신의 표현대로 「생몸심이 산냇긔 끊어지덧 끊어지는」미친 세월을 버텨 내보려는 눈물겨운 몸부림 같은 것이었으리라 헤아려 본다.
고등 공민학교 2학년 때로부터 비롯되어 수 없는 가출을 되풀이하던 끝에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이른바 출가하게된 데에는 『선가귀감』이 한 고리로 작용하고 있으니, 인연의 무서움이라니 !이 책을 통하여 나는 비로소 불교라는 것이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가르쳐주는 법(법)의 문(문)이라는 것과, 그리하여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한가지인 참선이야말로 어떠한 종교적 의례며 형식이며 제도며 규범 같은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로 그 깨달음의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고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부처」라는 것이 오로지 단 한 분만 존재하는 역사상의 고유 명사가 아니라 누구든 깨달음을 얻으면 지금 이 곳에서 그렇게 될 수 있는 보통 명사로서의 존재라는 것, 아니 생명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그리고 비록 그 문자의 뜻을 어렴풋이 헤아려볼 수 있을 뿐인 알음알이(지해)로서나마 업(업)이며 무명(무명)이며 윤회(윤회)며 공안(공안)이며 견성(견성)이며 보리(보제)며 번뇌(번뇌)며예토며·정토(정토)며 피안(피안)이며 열반이며······를 알게 된 것이었다.
「한 물건」을 찾기 위해 선방(선방)으로 갔다. 큰절에도 갔고 작은 절에도 갔으며 토굴에도 머물렀다. 바랑 하나 등에 지고, 나중에는 칫솔 한 자루만 꽂은 채로 삼일수하(삼일수하)의 떠돌이 객승으로 휴전선 이남의 땅은 안 다녀본 데가 없을 만큼 헤매고 다녔으니 오로지 「그 무엇」을 찾아 나의 것으로 해보자는 망상에서였다. 한 물건.
이 책에서 되풀이해 말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세속적인 학문이나 지식,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바탕이 되어 나오게 마련인 삿된 소견을 내지 말라는 것. 이른바 불립 문자(불립문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을 안 읽을 수도 없다는데 세속 중생의 괴로움이 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답답해 견딜 수가 없고, 책을 읽고 보면 더욱 답답해 껸딜 수가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얼음장이 갈라지는 것처럼 청렬(청렬)한 죽비 소리에 번쩍 눈을 뜬다. 나의 손에 닿는 것은 그러나 썩은 수돗물이 담긴 주전자. 진흙창의 똥바다를 헤매고 다녔던 어젯밤 명정의 거리가 떠오르면서 스님의 일갈(일갈)에 귓구멍이 터진다.

<공중에서 그림자를 붙잡아도 우습거늘 세상밖에 뛰는 것이 무에 그리 강하랴.>-김성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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