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에 켜진 적신호/권순용(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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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닥쳐오는 위험신호를 감지하지 못하는 유기체는 살아남지 못한다. 동물세계에서 우리는 이처럼 어김없는 자연법칙을 쉽게 본다. 인간세계에서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국가라는 유기체도,정부의 유기적 기능도 마찬가지다.
급격한 변화속의 우리사회 곳곳에는 지금 위험신호가 켜지고 있다. 입시를 둘러싼 대학에,의원활동과 관련한 국회에,행정처리를 둘러싼 국가기관 전체에 적신호가 켜졌다. 페놀사건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지금 그같은 신호를 표면에 드러난 것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분노와 규탄으로 끝내려 한다. 조금만 주의하면 볼 수 있는 구조적 적신호를 읽지않고 있는 느낌이다.
페놀을 쏟아버린 두산은 나쁘다. 국내굴지의 대기업이 이름도 모를 악덕업체에나 있을법한 짓을 저지른 행태는 말할 나위도 없다. 사건의 직접 원인이라는 사고후 조치도 납득하기 어렵다. 법적으로 규제된 배출물을 엄청나게 흘리고도 어떻게 시치미 떼고 있을 수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찌 페놀만이겠는가. 그리고 어찌 두산만이겠는가. 우리의 강산은 곳곳에서 중병을 앓고 있다. 조금만 귀기울이면 사방에서 신음이 들려오지 않는가. 그동안 우리사회를 지배해온 개발제일주의 가치관의 결과다. 그러나 그렇게만 해서는 잘 살 수 없다는 교훈을 이번 사건은 우리들에게 새삼 일깨워주었다.
어떤 기업도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국민의 기본권을 위협하는 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경고를 두산사건을 통해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엊그제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민의 의식수준은 달라져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중요한 신호는 정부에 보내진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능이 고장나 있다는 신호를 감지도,대처도 못하는 무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사후대책이라고 내놓은 「물대책」은 돈타령밖에 없다. 장비와 인력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걸 믿고 진심으로 이제부터는 수도물을 안심하고 마시겠다는 시민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수원지에 페놀을 흘린 것은 두산이다. 그러나 악취식수를 가정에 보내 마시도록 한 것은 누군가. 대구시가 했고 환경처가 방조하지 않았는가. 수원지 상류 공단폐수관리를 맡은 환경처는 페놀폐수 유출 가능성을 대구시에 알려주지 않았다. 비밀 배출을 둘러싸고 업체와 검은 거래가 있었다는 비리는 말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실수에 의한 사고조차 업체로부터 보고를 받거나 탐지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정수장은 또 어떠했는가. 소독약으로 넣은 염소와 페놀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냄새가 진동하는 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각 가정에 내보냈다. 시민들이 신고해오자 이번에는 염소투입량을 10배쯤으로 늘렸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하루가 거의 지나서야,그것도 대학교수로 있는 전공교수가 말해주어 원인을 눈치챘다.
그때는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집집마다 악취식수로 가득차 있었다. 시민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식수공급 책임을 맡고 있는 대구시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 며칠동안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아이를 업고 먹을 물을 구하러 다닌 고생이나 며칠씩 빵·과자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까. 배신감이었습니다.』 젖먹이 아기를 둔 30대 주부 김씨는 수도물에서 냄새가 가시기 시작한 닷새동안의 고통보다 대구시의 처사가 더 참기 어려웠다고 했다.
시민들에게 방송으로 알려주고 급수차를 동원하는 가장 기본적인 임무마저 외면한 처사는 당국의 분명한 직무유기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제는 아무리 무슨 소리를 해도 시민이 시를 믿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국민의 재난을 예방은 커녕 팔짱끼고 방치하는 정부라면 누구를 믿고 따르겠는가. 우려할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같은 정부기관끼리 협조체제를 이루어 국민을 위한 행정을 해야 하는데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데만 있지 않다.
국민의 생활을 위협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기능장애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심상치 않은 고장신호를 우리는 보았다. 정부의 기능수행에 켜진 붉은 신호등을 발견하고 장애증상을 치료하는 일은 기업의 각성 못지않게 이번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값비싼 대가를 강요하면서 보여주는 교훈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지 못한다면 불행이다.
페놀을 흘린 쪽은 물론 나쁘다. 응징되어야 한다. 사건의 심각성은 그러나 거기에만 있지 않다. 어떻게 환경처장관이나 대구시장이 책임이 없단 말인가. 장관이나 시장의 책무는 무엇인가. 관련 정부기관간의 수평적 협조나 상호보완기능은 누가 해야 할 일인가. 부하직원의 잘못이겠지만 1천만 주민을 공포에 떨게 한 재난의 책임이 어떻게 실무자 몇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수습이 중요하다는 이유라고 했다. 무엇을 수습하겠다는 것인가. 페놀은 이미 수습되지 않았는가. 수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민의 마음속에 이번 사태로 생긴 정부불신이다. 기업과 짜고 폐수방류를 눈감아준 파렴치나 악취가 진동하는 물을 각 가정에 보내놓고 불안에 떨도록 내버려둔 무책과 무능의 원인을 규명하고 수습하는 일만큼 돈 안들이고도 근본적인 일은 따로 없다. 그런걸 인식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감각이 안타까울 뿐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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