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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무늬 땀땀이, 시대정신과 소망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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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잘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는 유교 이상국가를 추구했다. 옷에서도 화려한 색상과 무늬를 절제하고 단색과 은은한 무늬를 즐겨 사용했다. 특히 성리학이 강화된 후기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뚜렷해졌다.

조선시대 옷과 관련된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바로 연산군과 영조다. 연산군은 정치에선 실패했지만 직물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군주다. 그는 1504년 직물을 생산하는 기구인 통직(通織)을 설치하고, 직조.염색 등 분야별 분업을 도입했다. 흥미로운 건 '옷감 실명제'를 시행했다는 사실이다. 옷감에 장인(匠人)의 이름을 직접 기록하게 해 직물의 고급화를 꾀했다.

색동치마를 입고 있는 고구려 수산리
고분의 여인(右)과 조선시대 즐겨
입었던 색동저고리.(上)

반면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룬 영조는 무늬 있는 옷감을 억제했다. 1747년 적색.청색.녹색 등의 옷감을 짜되 무늬를 없애도록 지시했다. 1776년 민간에서는 물론 상의원(尙衣院.임금의 의복, 궁내 일용품 등을 관리하던 관아)에서도 무늬 있는 직물을 만들지 못하도록 했다.

두 왕의 정책은 달라진 시대를 반영한다.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유교적 질서와 규율이 강조된 까닭에 사대부 계층은 문양이 화려한 의복을 자제했다. 그리고 정갈하고 검소한 옷을 선호했다.

현대사회에선 사람을 '브랜드'로 평가하곤 한다. 어떤 회사의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어떤 명품을 착용했느냐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곤 한다. 옷, 나아가 옷에 찍힌 무늬는 단순한 장식을 넘어 개인과 집단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물로 작용한다. 예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옷감(무늬)에는 그 시대의 사상과 미의식이 농축돼 있는 것이다.

우리 전통복식에 나타난 무늬(문양)를 집대성하는 작업이 일단락됐다. 연말 선보이는 '우리나라 전통 무늬-직물편'(국립문화재연구소 발간)이다. 한국의 전통문양을 정리한 서적이 드문드문 나왔으나 이번 연구서는 각 무늬의 시대적 특성과 미학적 성취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총 210여 점의 유물(의복.옷감)에 나타난 무늬를 복원하고, 상세한 일러스트레이션도 곁들여 앞으로 문화 콘텐트로서의 활용도를 높였다. 미술사.복식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훌륭하다. 책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한국인의 옷을 수놓아온 각종 무늬가 실려 있다.

조선시대 양반댁 여성의 혼례복인 활옷.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다양한 무늬를 수놓았다.

한국인이 무늬가 있는 옷을 입었다는 기록은 중국 진(晉)나라 때 진수가 지은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에 처음 나온다. 부여인은 무늬가 새겨진 견직물.모직물을 입었다고 나와있다. 고구려의 옷감 무늬는 여러 고분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평남 남포시 수산리 고분에는 세로줄 무늬의 색동치마를 입은 귀부인이 등장한다. 평양 동암리 고분에선 우리가 흔히 체크무늬라고 부르는, 주황색과 검은색 격자무늬가 있는 통바지를 입은 남성을 볼 수 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견직물이 출토됐으며, 신라 천마총에선 적색의 기하무늬가 있는 금(錦.비단)이 나오기도 했다. 불교 귀족문화가 만개했던 고려시대에는 중국 진(晋)나라 황제가 "무늬와 색이 중국 것보다 우월하다"고 격찬할 만큼 화려한 직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무늬 하나하나에는 옛 사람의 희망과 기쁨이 담겨있다. 예컨대 연꽃은 영생과 고귀함을, 모란은 부귀를 상징했다. 원앙은 금슬 좋은 부부를, 복숭아.석류무늬는 장수와 자손번성을 대변했다.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십장생무늬와 박쥐무늬는 각기 장수와 다산을 상징했다. 용과 봉황무늬는 왕족이 아닌 사람은 사용할 수 없었으며, 구름무늬에는 신분상승에 대한 열망이 숨겨져 있다.

무늬는 곧 우리 문화, 나아가 정신세계를 읽는 '코드'인 것이다. 책에는 식물무늬(사계절꽃.사군자.포도), 동물무늬(용.토끼.나비), 자연산수무늬(구름.물결).기물무늬(보배.화분), 기하무늬(귀갑.색동) 등이 망라됐다. '우리나라 전통 무늬'는 앞으로 도자기.금속공예.목칠공예.기와.단청 등 총 8권의 시리즈로 완간될 예정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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