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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15. 밀전병 도시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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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61년, 우리나라에 주재하던 외교관 부인들을 위해 한복을 응용한 드레스 패션쇼를 열었다. 각국 외교 사절과 부인들은 한복을 모티브로 한 드레스에 큰 관심을 보였다. 드레스는 대부분 기장이 긴 것들이었지만 짧은 길이의 작품도 선보였다. 모델은 1961년 미스코리아 진인 서양희씨로 그 해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출전해 15명이 아름다움을 뽐내는 준결선까지 진출했다.

1945년 8월 15일, 서울 거리에는 "만세" 소리가 쏟아졌다. 거리는 기쁨에 들떠 뛰어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고, 온 나라는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었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눠졌고, 열강들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결사적인 데모는 연일 계속되었다.

정치권에서는 정당 간 주도권 쟁탈전으로 정국이 혼미했다. 경제도 엉망이었다. 돈의 가치는 나날이 떨어져 밥 한 끼를 사먹으려면 조금 과장해서 밥 값으로 돈을 지게에 지고 가야 할 정도였다. 이북의 땅문서들은 모조리 휴지가 되어 버렸다. 내 부모님도 서울 계동의 2층 양옥을 팔고 신당동의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이리와 앉아라. 명자야, 세상이 크게 바뀌고 있단다. 그러니 괴로운 일들은 다 잊고 앞으로 네 스스로 살 길을 찾도록 해라. 무엇이든지 도와 줄 테니."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공부를 더 하고 싶습니다."

일제시대 때 아버지께 신세를 졌던 모윤숙씨가 이화여전에 편입하는 방법을 알아봐 주신다고 했으나, 경기고녀(현 경기여고)를 떠들썩하게 하며 결혼했던 나는 편입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축하 속에 일본으로 시집갔던 나였는데, 이제 과부가 될 지도 모르는 처지에 여자대학교에 다닌다면 주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편입을 포기하고 영어 공부에만 전념했다. 미군 부대에서 영문 타자기를 빌려다가 종이에 실물 크기의 자판을 그렸다. 매일 그 종이 자판을 손으로 두들기며 영문 타이핑에 몰두했다. 3개월 뒤 영어 타이핑에 익숙해진 나는 미 군정청의 보건후생부에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나의 첫 직장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첫 월급은 고스란히 어머니께 드렸고, 어머니는 한 달치 전차표와 하루 한 잔의 커피 값을 주셨다.

문제는 점심 도시락이었다. 미국인들과 같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냄새가 심한 한국음식을 내놓고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이 밀전병이었다. 매일 아침 호박을 썰어 넣고 밀전병을 부쳐 기름종이에 싸서 들고 다녔다.

그런데 얼마 뒤 이 밀전병 도시락이 위기를 맞게 된다. 세월이 얼마 지나 외국인 장성의 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미군 부대 내 미용실에서 통역일을 맡았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가던 중 문제가 생겼다.

미용사들은 거의 매일 고급 양식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밀전병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어느날 미용사 친구들이 양식집에 함께 가자고 나를 졸랐다. 미용사들에게 떠밀려 '플라워'라는 고급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당당하게 밀전병 보따리를 펼쳐 놓고 웨이터를 불러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미용사들 모두가 놀란 표정이었다. 그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끝까지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노라·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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