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크리스마스에 생각하는 입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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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크리스마스인 오늘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어린이들의 삶과 미래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 어린이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포근히 기댈 수 있는 가정이란 울타리다. 빈곤아동, 특히 결식아동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원초적인 문제는 가정이 없는 아동이 겪어야 하는 시련이다. 어린이에게는 집 없는 설움보다도 가족이 없는 외톨이 신세가 훨씬 더 큰 불운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이 없는 딱한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가정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우선 떠오르는 것이 우리의 입양제도와 입양아의 운명이다. 지난 몇 해만 보더라도 매년 4000명 내외의 어린이가 국내는 물론 국외로 입양됐다. 입양은 가족제도의 전통과 관습, 민법을 비롯한 제반 법률의 문제 등이 얽혀 있어 결코 간단히 처리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다행히도 보건복지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와 입양 관련 단체 및 전문 인사들의 노력으로 입양 문제에 대한 국가적 대처는 긍정적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다. 특히 국내 입양이 꾸준히 증가해 전체의 42%를 차지하게 된 것, 그리고 해외동포재단이 앞장선 해외입양아 관리의 획기적 개선 등은 주목할 만한 진전이다. '입양의 날'이 제정된 것이 바로 그러한 진전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해외 입양이 아직도 전체 입양의 절반을 넘고 있으며 더욱이 장애아 입양은 해외입양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 등은 간과해선 안 될 일이다. 1954년에 시작돼 반세기 넘게 해외로 입양된 어린이의 수는 공식통계로 19만3000명을 넘었다. 초기 몇 해 동안에는 혼혈아 중심의 입양이었으나 그 후로는 비혼혈아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가족 없는 어린이의 문제, 특히 입양아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 원칙은 어린이 자신의 행복과 인간적 권리가 다른 어떤 고려보다도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어린이를 해외로 입양시키는 것은 아무리 세계화 시대라 해도 우리의 자존심에 부담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당사자인 어린이에게는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사랑과 보살핌이 있는 가정에 속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입양이 자동적으로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1956년에 입양돼 지금은 홀트재단의 대외담당 부회장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작년에는 서울의 명예시민이 된 수전 순금 콕스(Susan Soon-keum Cox)의 말대로 입양은 쓰면서도 달콤한(bitter-sweet) 경험이다. 그러나 바로 그 경험이 그들의 행복과 직결돼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 10월 하순 미국 오리건주의 유진(Eugene)에서는 창립50주년을 맞은 홀트국제아동재단 주최로 '가정 없는 어린이에 대한 세계적 대응'이란 국제회의가 열렸었다. 한국전쟁으로 가정과 가족을 잃고 헤매는 수많은 어린이의 미국 입양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 해리 홀트(Harry Holt) 내외와 그 후계자들의 공헌을 기리고 세계적 문제로 확산되는 가정 없는 어린이 문제에 대한 국제적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무엇보다도 이 자리에서 100여 명의 한국입양아들을 만나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단편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뜻 깊은 경험이었으며 이 자리에 함께한 57세에서 7세까지의 여러 입양아의 기구한 운명을 되짚어 보면서 우리 민족이 겪어 온 파란의 역사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생소한 이국으로 입양돼 수많은 역경을 넘으면서도 가정과 가족이 주는 사랑에 힘입어 각자 제 몫을 다하며 건강하게 자라 스스로가 가정을 소중히 생각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고 한국의 뿌리를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음을 볼 때 여간 자랑스럽지 않았다.

입양아의 문제는 대부분 건전한 가정을 지키지 못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다시 한번 우리는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의 울타리인 가정에 대해,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에 대해 공동체적 관심을 한층 새롭게 하며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사랑 안에서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