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KAL 참사에 답하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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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선 충격과 분노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83년 8월 소련 영공에서의 대한항공기 격추진상에 대한 일본 TV보도를 접하고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국민이 얼마나 될까.
참혹한 기체의 잔해,희생자의 유체사진과 함께 민간비행기인줄 알고서도 격추명령에 따랐다는 소련 공군조종사의 증언은 할 말을 잊게 한다. 그 비인간적인 행위에 더해 진상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한 소련당국에 우리는 1차적으로 분노하며 책임을 묻고자 한다.
그에 못지 않게 우리는 정부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대통령의 화려한 소련 방문외교 이후 불과 넉달 남짓한 사이에 여러 경로를 통해 그 진상에 대한 보도가 있어 왔다.
격추 직후 소련 당국이 기체와 희생자의 유체는 물론,진상규명의 열쇠인 블랙박스를 회수했다는 보도가 잇따라 있었다. 정부로서는 당연히 그러한 보도의 진위를 가릴 정보수집능력과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어야 마땅하다.
정부는 물론,진상을 밝히는 노력을 하겠다고 다짐해 왔었다. 그러한 정부의 말을 믿었던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것은 그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사진의 입수능력조차 당사자가 아닌 외국의 보도기관만도 못하다는 사실이다.
소련의 정부기관지마저 지난 2월 10회에 걸쳐 연재하며 진상을 밝힐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는데도 외교적 발언으로 일관하며 속수무책이었던 정부의 태도에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에 대해 정부는 당초 지난해 12월 노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외무장관 회담에서 소련측의 유감표명에 만족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외교적 성과는 거두었다고 믿었단 말인가.
한소 수교협상이 본격화되면서 국내 여론들은 수교전에 이 문제에 대한 책임소재를 분명히 해두어야 된다고 촉구했던 것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비단 이 문제뿐 아니라 6·25의 책임을 포함해서 누적돼 왔던 양국간의 문제들을 말끔히 정리한 바탕위에서 참다운 우호협력관계가 가능하다는 점을 누누이 지적해왔다.
그러한 지적은 정부가 북방외교를 전개하며 외형상의 외교업적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참다운 국익을 소홀히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상대방이 언짢아 하는 부분들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되도록 갈등요인들을 덮어두고 뒤로 미루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한 우려는 이제 우리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우려로만 그칠 일이 아니다. 직접 격추한 조종사의 발언과 사진들이 진상을 덮을 수 없는 명백한 증거로 나타난 이상 책임소재를 밝히고 소련정부의 사과와 희생자 유족에 대한 배상문제를 거론할 때가 됐다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가 분명히 따져야 할 문제가 있는데도 이를 덮어두고 30억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을 제공할 만큼 두 나라 관계가 발전했다고 자랑할 때는 아니다. 걸음마 단계의 한소 관계발전을 위해서는 진상규명을 위한 정부의 단호한 태도와 소련당국의 성의있는 대응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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