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남은 1년이 걱정스럽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대통령이 국민의 얼굴에 흙탕물을 튀겨 놓았다. "나랑 한번 붙어볼래"라는 표정으로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있는 대통령. 핵실험.주사파 세력에게 내려쳐야 할 주먹을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90%의 국민에게 내려치는 대통령. 지금 우리의 대통령은 도자기 가게에 뛰어든 황소 같다. 그가 4년간 수없는 막말로 국가의 위신을 부숴 놓았는데 앞으로 무엇을 더 부술지 국민은 불안하다.

그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에서 대통령이 행한 70분짜리 연설은 신문에 잘 인쇄돼 있다. 건국 이래 9명의 대통령(내각제 윤보선 포함)이 남긴 공개 어록 중에서 이날의 연설은 가장 부끄럽고 품위가 없는 것이다. 국민은 이를 오려 두어야 한다. 그랬다가 때때로 꺼내 보면서 잘못된 선택의 처절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안보관.미국관.대통령관.인사(人事)관…이 모든 부문에서 대통령은 심각한 정서적 불안과 편집증을 드러냈다. 그중 최악은 역시 대통령의 언어 수준이다. 언어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온전한 국정을 펼 수 있겠느냐의 문제다.

대통령은 일찍이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면 그도 '대통령의 언어법'에 대해 어느 정도는 학습할 줄로 우리는 기대했다. 그런데 고질은 더 악화됐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놈"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에 대한 비판엔 "참 억울하다. 나는 제정신"이라고 했다. 그는 "(링컨처럼 포용인사를 하고도)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고 살았다" "(미사일 대처 회의가 늦었다고) 나를 얼마나 구박을 주는지"라고 푸념했다. 그 많은 인사 파동.안보 실책에서 결국 그는 반성보다는 분노만 쌓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막말에는 울타리가 없다. 외교건 안보건 언론이건 군대건 그의 입에 걸리면 품윌랑 부숴져 버린다. 국방비에 대해 "그 많은 돈을 우리 군인들이 다 떡 사 먹었느냐"고 했고,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반대한 국방원로들에게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기인가"라고 했다. 자주국방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들은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형님 빽만 믿는" 사람이 돼 버렸다. 6자회담이 열리고 있는데도 대통령은 우방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에 대해 "나쁘게 보면 (국무부와 재무부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에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라는 표현도 붙여 놓았다. 과거 장관들은 언론의 비판에 "언제 술이나 한잔 하지"라고 했다며 언론을 접대의 수준으로 낮춰 놓았다.

대통령의 막말이 단순한 한풀이나 '성마름'의 표출이라면 낫겠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대통령은 계산된 의도도 드러내고 있다. 통합신당의 주역들로 거론되는 고건.정동영.김근태씨를 무차별 공격한 것이다. 이는 대선 국면에서 '부정(不定)의 영향력'을 발휘해 노무현식 정치를 사수하겠다는 의지다. 대통령이 휘저어 놓을 혼란이 참으로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