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이공계 연구소장은 '신이 내린 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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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정부 출연 이공계 연구소장 자리는 쉬어 가기 딱 좋은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올 들어 취업 전선에는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연구소장 자리도 거기에 버금가는 것 같다.

기관장으로서 받는 주요 스트레스인 경영 성과,임기 중 해직과 임기 후 자리에 대한 걱정이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본인들이야 할 말이 많겠지만 최소한 취재기자의 눈에 비친 모습은 그렇다. 연구소장들은 자신의 비리가 있으면 모를까 경영 성과가 낮은 책임을 지고 임기 중에 나가겠다고 손을 들거나 나가라고 하는 사람 역시 아직 보지 못했다. 임기는 3년으로 정해져 있고, 그 안에 해직된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연구소 안에서는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린다. 언론의 주목도 크게 받지 않으니 조용히 지내는 데 안성맞춤이다. 임기가 끝나면 예외적인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 다시 원래의 연구실로 돌아갈 수 있다.

이만한 조건의 기관장 자리를 어디 찾기 쉬운 일인가. 이 때문에 연구소장 자리는 쉬어 가려고 맘먹은 사람한테는 최고다. 그렇지만 일을 해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힘든 곳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짧은 임기, 성과를 잘 내봐야 보장되지 않는 연임, 시시콜콜 간섭하는 정부 등 굳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여지가 없는 환경이다. 이 때문에 시끌시끌한 일 없이 무탈하게 지내는 연구소장이 아주 잘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이공계 연구소장들은 취임하자마자 연구성과를 잘 내려고 머리를 싸매기보다는 연임 운동을 시작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까.

지난달 독일 과학계의 거장인 한스 위르겐 바르네케 전 독일 프라운호퍼 총재를 슈투트가르트 인근 생산기술연구소(IPA) 내 집무실에서 만났을 때 한국의 이런 현실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수십 년간 연구소장(21년)과 총재(10년)를 지낸 그와 우리나라의 상황이 극명하게 대비됐기 때문이다. 프라운호퍼연구소는 산하에 57개 전문연구소를 두고 있으며, 연간 예산이 10억 유로(약 1조3000억원)에 이르는 독일 3대 공공 연구그룹 중 하나다. 바르네케 전 총재가 이 연구그룹을 반석에 올려놓은 사람이다.

그의 사무실에 그 흔한 개인용 컴퓨터가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속으로 칠순의 고령이어서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몰라서 그러지 않나 싶어 확인차 그 이유를 물었다. 뜻밖에도 그는 집에서 컴퓨터로 정교한 모형 배를 설계하고 만드는 게 취미일 정도로 컴퓨터 고수였다. 그러나 사무실에서만큼은 사람을 만나고 기관의 사활이 걸린 문제들을 해결하고 미래 전략을 짜는 등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컴퓨터를 일부러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나온 이후 지금까지다. 이런 게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리에 걸맞은 일을 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을 때는 그 의미가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프라운호퍼 산하 전문연구소장의 임기는 교수 정년(65세)까지다. 바르네케 역시 생산기술연구소장을 맡았을 때 37세였으며, 65세까지가 임기였다. 과학은 연구계획을 세우는 데만 1~2년, 연구하는 데 4~5년, 상용화하는 데 2~3년이 걸리기 때문에 연구소장의 임기는 최소 10년은 되어야 한다는 게 바르네케의 지론이었다. 3년 연임도 가뭄에 콩 나듯이 극히 몇 명만이 '행운'을 잡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고 보면 독일의 정책이 마냥 부럽게 느껴졌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나라 연구소장들에게 집무실의 컴퓨터를 치우라고 하고, 정부에는 임기를 대폭 늘리고 '좋은 경영 성과=연임'의 등식이 성립되도록 하라고 주문하면 과욕일까. 연봉도 서너 배 올려주는 대신 엄정하게 책임을 물어 성과가 형편없을 때는 중도하차하게 하면 어떨까. 독일과 한국의 현실은 차이가 있지만 연구소의 본업인 연구 성과를 잘 내게 하는 방법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연구소장 자리가 '쉬어 가기에 아주 좋은 자리'라는 인식이 사라질 날을 고대해 본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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