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제에 유권자가 생각할 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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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자제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 의미를 놓고 두갈래의 흐름이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정치권과 국민들사이에 따로 따로 흐르고 있는 이 두갈래중 어느 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느냐에 따라 우리 정치의 장래는 비관쪽으로 흐를 수도 있고 낙관쪽으로 흐를 수도 있다.
첫째 흐름은 여야를 막론하고 기성정치세력이 이번 기초단위 의회선거를,앞으로 자신들이 추구하려는 정치구도의 도약대로 삼겠다는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은 6공들어 어느 정당도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한 각 정당·정파에는 실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입으로야 무슨 비단결같은 소리를 하든 이번 선거에 임하는 각 정당의 태세는 임전의 그것과 다를게 없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각 정당은 세를 확장해서 6월께 있을 광역의회와 내년의 국회의원선거 및 기초·광역자치단체장선거,그 다음 해에 있을 대통령선거로 향하는 길을 닦아야 하는 정치적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 다수 후보의 정당연계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게 될 이번 선거에서 어느 당이든 분명한 득세,또는 약세를 드러내게 될 경우 그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구도를 향한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예컨대 민자당 성향의 후보들이 뚜렷하게 득세한다면 「국민이 원치 않는 한 않겠다」던 내각제개헌 추진세력이 힘을 얻게 될 것이고 3당합당직후에 슬쩍 내보였던 보수성향이 강하게 고개를 내밀 것이다. 반대로 크게 배척당할 경우 그 반대 성향의 계파가 목소리를 돋우며 이른바 물갈이론·분당론·신당론 등 그동안 심심하면 고개를 들었거나 안에서만 분분했던 움직임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커질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평민당의 경우 그들 의도대로 이번 선거와 곧 있을 광역의회선거에서 득세하거나 적어도 지역당으로서의 한계를 분명히 벗어날 경우 민자당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관계를 청산하고 바로 대권을 향한 공세적 투쟁으로 돌아 설 것이다. 심지어 이를 발판으로 정권퇴진운동이 강력히 대두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과거선거결과의 재판이 되거나 그 보다 약세를 드러낼 경우,역시 이에 대처하는 궤도수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주당이나 민중당이 바라는 바는 그동안 여러번 여론조사에서 확인된 기성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깊은 불신이 자기들에 대한 지지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바람만 불어준다면 이들은 다음 선거에서 물갈이의 주역이 되기위해 새로운 구도를 마련하려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정치권이 이번 선거에 거는 나름대로의 기대와 의도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미는 후보의 당선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게 틀림없다.
이와 같은 정치권의 조직화된 공세앞에서 둘째흐름이 맞서고 있는 형세다. 그것은 정치권의 논리와는 상관없이 지방자치제가 중앙정치권의 오탁에 휘말리지 않고 진실로 지방 주민들의 자치를 가능케 해주는 제도가 마련되기를 열망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염원이다.
이 흐름은 강렬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못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등 시민운동단체가 나서고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대단히 고무적이다. 그러나 초장부터 난무하기 시작한 과거의 부패 및 탈법선거 망령들을 보면 선관위나 이들 시민단체들로서는 이에 대적하기가 너무나 역부족이다. 이들의 헌신적 노력이 성과를 거두려면 모든 국민이 자신의 일임을 인식하고 이에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이번 선거가 정치권이 의도하고 추진하는 대로 휩쓸려 버린다면 지자제실시에 걸었던 순수한 기대는 허물어져 버리고 중앙정치 무대의 온갖 추잡한 행태가 지방단위로까지 확산되어 지자제를 실시하기 전보다 우리의 정치는 더 큰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유권자들이 이번 선거에 임함에 있어서 정치권이 부여하고 있는 의미를 냉철히 꿰뚫어 보고 옥석을 가려 투표권을 행사해 주기를 바란다.
정부는 수서비리의 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이번 선거를 공명하게 치르는데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역시 앞에서 지적한 첫째 흐름의 한 당사자이고 정치권 전체의 집념이 강하며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선거의 타성이 그리 쉽게 사라지기는어렵다고 보기 때문에 큰 기대를 거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이번 선거가 중앙정치판의 더러운 꼬리로 전락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지자제 본연의 기능과 역할,즉 지금까지 중앙집권의 오랜 전통속에서 늘 피해만 보아온 지방주민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안녕을 스스로의 의사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제도라는 투철한 인식으로 투표를 하는 길밖에 없다.
그것은 한잔의 술이나 돈봉투로 팔아넘기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임을 모두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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