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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의영화만담] '싸이보그지만 …' 영군 할머니는 왜 자신을 쥐라 생각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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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일종의' 로맨틱 코미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셨나요? 이 귀여운 러브 스토리에서 영군(임수정)의 할머니는 당신이 쥐라는 환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하얀맨'들에게 잡혀가죠. 악착같이 무를 갉아 대는 할머니 모습이 처음엔 우습다가 나중엔 서글프게 느껴지더군요. 할머니는 왜 하필 쥐의 환각을 갖게 된 걸까요? 그래서 '쥐와 인간'(시유시)이란 책을 뒤적여 몇 가지 힌트를 찾아냈지요.

유사 이래 쥐라는 동물은 인간이 가장 멸시하고 혐오하며 또 증오하는 동물입니다. "그저 또 다른 쥐를 만들어 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한 마디로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라네요.

게다가 쥐는 우리가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세상의 이면을 끈질기게 상기시키는 존재입니다. 음습한 하수도와 악취 나는 쓰레기장, 문명의 게토와 야만의 잔여물을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인류는 줄기차게 쥐, 혹은 쥐새끼 같은 인간을 격리하고 박멸함으로써 어둡고 음울한 세상의 이면까지 함께 덮어두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쥐의 상징체계를 열심히 연구한 미셀 당셀이라는 사람은 "인간이 쥐와 비교하는 걸 불쾌해 하는 것은 유사성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쥐와 인간은 DNA 구조의 놀라운 유사성은 차치하더라도(실험실에서 괜히 쥐로 실험하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사회적 행동까지도 닮았다는 게 정설입니다. 두 종이 공유하는 가장 큰 특성은 호기심이라는군요. 오죽하면 미궁에 가둬놓았을 때 미궁의 구조 그 자체를 탐색하기 위해 눈앞의 먹이를 포기하는 동물은 인간과 쥐밖에 없다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신을 쥐와 동일시한 영군 할머니의 행동이 아주 뜬금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끌려간 영군의 할머니는 사실 그 누구보다 솔직히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영군 할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호감을 표한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캐릭터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이 쓴 소설 '생쥐와 인간', 애니메이션 캐릭터 '미키 마우스'와 '톰과 제리'의 제리, 그리고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책 '쥐'가 대표적이지요. 이처럼 소외받고 핍박받는 민중은 자주 자신을 쥐와 동일시하며 설움을 달랬습니다. 영군 할머니가 무를 갉아먹은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겠지요.

다른 추측도 가능합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쥐는 '시간의 상징'이라고 책은 전합니다. "인간들이 사물과 기록을 통해서나마 영원히 살고 싶어하지만 그것들마저 쥐의 이빨에 갉아먹히는 걸 보며 세월의 이빨에 갉아먹히고 쇠락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일깨우기 때문에 더욱 쥐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럼 영군네 가족들은 자기들 눈앞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갉아 대는 할머니가 꼴 보기 싫었던 걸까요? 자신들의 창창한 세월도 함께 갉아먹히는 느낌이 들어서? 정말 그래서입니까, 영군 어머니?

김세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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