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기의 휴먼골프 <30> 이왈종 화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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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은 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것이죠."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교수 직을 내던지고 제주도에 정착한 지 15년째인 이왈종(사진) 화백에게 골프와 작품 활동의 공통점을 묻자 나온 이야기다.

인간은 무언가에 집착하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시기하고 다투게 되니 집착을 버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몰입도 집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았더니 "몰입은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일에 빠져드는 것이므로 집착을 벗어난 것"이라고 했다.

이 화백과는 4년 전에 '골연(골프로 맺은 아름다운 인연)'을 맺어 서귀포에 있는 작업실을 방문할 수 있었다. 쪽빛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작은 집이었다. 정원에는 풀꽃들이 심어져 있고, 커다란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작업실에는 대형 조각 작품들이 작업 중인 상태로 곳곳에 있고 그 사이에 골프채가 당당히 놓여 있다.

이 화백은 순수 화가 중에서 처음으로 골프화(골프장, 퍼팅하는 모습, 벙커샷 하는 모습 등)를 그린 분이다. 처음에는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으나 지금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골프도 자연이고 예술입니다. 골프하는 모습을 그리면 안 된다는 것은 오만과 편견입니다."

작업실 구경을 끝내고 핀크스CC로 장소를 옮겼다. 우리 일행은 오후 늦은 시간을 이용해 9홀만 돌았다.

이 화백은 라운드하기 전에 골프공에다 유성펜으로 그림을 그린다. 내용은 춘화인데 섹시하다는 느낌보다 원시 벽화에 나오는 문화유적 같은 느낌이 든다. 이 공 8개를 한 세트로 한 작품이 몇 년 전 전시회에서 800만원에 팔렸으니까 공 하나에 100만원인 셈이다. 5000원짜리 골프공에 그림을 그리고 사인을 하면 100만원짜리 작품이 되니 엄청난 가치창조다.

만약 OB가 나면 캐디를 포함해 누구든지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임자다. 4년 전에는 캐디가 한 개, 나도 한 개를 찾는 행운이 있었으나 이날은 한 개의 OB도 없었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은 드라이버 비거리가 엄청나게 늘었다는 것이다. 예순이 넘은 나이인데도 250~260야드를 날렸다. 결과는 버디 2개, 보기 3개로 1오버파를 쳤다.

"점수에는 관심을 끊은 지 오래됐고, 요즘은 내기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공에만 몰입하니까 괜찮은 샷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생활의 중도'라는 주제로 작품 활동에 빠져 있는 이 화백의 소재는 바람.파도.나무.새.들꽃이다. 그 작품 속에 문득문득 골프채와 그린과 벙커가 나타난다. 그가 만난 골프는 순수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오늘의 원 포인트 레슨=집착을 버리고 몰입하라.

윤은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부총장.경영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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