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기계 창업자인 서암 권승관 회장(2004년 작고)은 '기계와 함께 걸어온 외길'이란 자서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공작기계인 벨트 구동식 선반이 탄생하는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화천(貨泉)'은 우리나라 공작기계의 산 역사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주물공으로 일하던 권 회장은 해방 직후 그 공장을 넘겨 받았다. 52년엔 이 공장의 이름을 화천기공으로 지어 본격적으로 철구조물 사업을 했다. 당시 저수지 갑문 제작 등 정부 발주 공사를 많이했다. 그러나 일감이 쌓일수록 정부 관리들이 뒷 돈을 많이 요구해 손해를 보게 되자 기계 제작 쪽으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60~70년대 제조업체가 하나 둘씩 늘면서 일제보다 싸고 쓸만한 성능을 갖춘 화천의 기계는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 이에 힘입어 70년대 화천은 큰 그림을 그렸다. 정부의 지원 아래 75년 공장기계 전문 생산업체인 화천기계를 설립했고 경남 창원에 3만평 규모의 공장을 지었다. 당시 한 직업훈련원을 시찰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기계 하나로 여러 모양의 부품을 깎는 모습을 보고 공작기계 사업지원책을 강구하라고 정부에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월 200대씩 생산된 기계는 팔리지 않은채 창고에 쌓였다. 77년 이 회사에 입사한 조규승(사진) 사장은 "6~7개월 동안 직원 월급을 줄 수가 없었고 빌린돈을 갚으라는 은행의 독촉에 시달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화천을 되 살린 것은 현대자동차의 '포니2' 였다. 80년 포니2 생산라인을 짓던 현대차는 기어.브레이크 등 핵심부품의 가공설비로 화천의 기계를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독일과 일본 기계로 채워진 포니1 생산라인을 벤치마킹한게 주효했다. 이후에도 화천은 여러 차례의 시련을 딛고 일어서야 했다.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무렵인 80년대에 대우중공업.기아기공 등 대기업들이 속속 공작기계 시장에 뛰어들어 화천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졌다. 조 사장은 "20여년 간 쌓아온 기계설계와 제작 기술이 있었기에 대기업의 가격인하 공세를 견딜수 있었지만 시장을 넓히는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화천의 양대축은 생산설비라인을 구축해주는 화천기계와 컴퓨터로 제어되는(CNC. Computer Numeriacl Control) 정밀공작기계를 만드는 화천기공이다. 지난해 두 회사와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계열사 서암기계공업의 매출을 모두 합치면 3000억원에 이른다.
◆화천기계공업은
-1952년 모회사 화천기공 출범후
75년 화천기계공업 설립.
-대표이사 : 조규승 사장
-관계사 : 화천기공, 서암기계 공업
-사업장 : 서울 방배동 본사, 경남 창원 공장, 광주(화천기공) 공장
글=임장혁 기자 <jhim@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