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깎고 조이고 닦고 기계와 함께 55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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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기계를 스케치해서 도면을 만들기까지 2개월이 걸렸다. 설계대로 모형을 뜨고 주형을 만들어 쇳물을 붓기까지 또 2개월이 소요됐다.드디어 주형에 쇳물을 붓는 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찬물에 목욕재계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용선로에 불을 지폈다. 쇳물을 주형에 붓다가 뜨거운 쇳물이 발등에 떨어졌지만 나는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화천기계 창업자인 서암 권승관 회장(2004년 작고)은 '기계와 함께 걸어온 외길'이란 자서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공작기계인 벨트 구동식 선반이 탄생하는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화천(貨泉)'은 우리나라 공작기계의 산 역사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주물공으로 일하던 권 회장은 해방 직후 그 공장을 넘겨 받았다. 52년엔 이 공장의 이름을 화천기공으로 지어 본격적으로 철구조물 사업을 했다. 당시 저수지 갑문 제작 등 정부 발주 공사를 많이했다. 그러나 일감이 쌓일수록 정부 관리들이 뒷 돈을 많이 요구해 손해를 보게 되자 기계 제작 쪽으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60~70년대 제조업체가 하나 둘씩 늘면서 일제보다 싸고 쓸만한 성능을 갖춘 화천의 기계는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 이에 힘입어 70년대 화천은 큰 그림을 그렸다. 정부의 지원 아래 75년 공장기계 전문 생산업체인 화천기계를 설립했고 경남 창원에 3만평 규모의 공장을 지었다. 당시 한 직업훈련원을 시찰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기계 하나로 여러 모양의 부품을 깎는 모습을 보고 공작기계 사업지원책을 강구하라고 정부에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월 200대씩 생산된 기계는 팔리지 않은채 창고에 쌓였다. 77년 이 회사에 입사한 조규승(사진) 사장은 "6~7개월 동안 직원 월급을 줄 수가 없었고 빌린돈을 갚으라는 은행의 독촉에 시달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화천을 되 살린 것은 현대자동차의 '포니2' 였다. 80년 포니2 생산라인을 짓던 현대차는 기어.브레이크 등 핵심부품의 가공설비로 화천의 기계를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독일과 일본 기계로 채워진 포니1 생산라인을 벤치마킹한게 주효했다. 이후에도 화천은 여러 차례의 시련을 딛고 일어서야 했다.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무렵인 80년대에 대우중공업.기아기공 등 대기업들이 속속 공작기계 시장에 뛰어들어 화천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졌다. 조 사장은 "20여년 간 쌓아온 기계설계와 제작 기술이 있었기에 대기업의 가격인하 공세를 견딜수 있었지만 시장을 넓히는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외환위기 역시 화천을 비켜가지 않았다. 기업의 투자가 크게 줄자 98년 600억원대에 이르던 화천기계의 매출은 다음해 반토막났다.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다. 창투.리스 등 계열사를 정리했다. 그러나 감원하지 않았다. 4교대로 '일자리 나누기' 를 해 엔지니어들을 붙잡았다. 이 인력들을 동원해 자동차 실린더 블록 제작에 뛰어들었다. 정체된 공작기계 시장의 출구를 뚫기 위해 시작한 이 사업은 지난해 300억원대 매출을 올리며 화천의 효자사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화천은 2000년 이후 흑자 행진을 이어가면서 빚 한푼 없는 회사가 됐다. 화천은 지금 항공기 부품사업을 준비중이다. 이를 위해 최근 독일 명문 아헨 공대 출신의 서대원 부사장을 영입해 사업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인도시장을 집중 공략해 현재 매출의 30% 수준인 수출비중을 60%까지 끌어 올릴 계획이다.

한편 화천의 양대축은 생산설비라인을 구축해주는 화천기계와 컴퓨터로 제어되는(CNC. Computer Numeriacl Control) 정밀공작기계를 만드는 화천기공이다. 지난해 두 회사와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계열사 서암기계공업의 매출을 모두 합치면 3000억원에 이른다.

◆화천기계공업은

-1952년 모회사 화천기공 출범후

75년 화천기계공업 설립.

-대표이사 : 조규승 사장

-관계사 : 화천기공, 서암기계 공업

-사업장 : 서울 방배동 본사, 경남 창원 공장, 광주(화천기공) 공장

글=임장혁 기자 <jhim@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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