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6. 학도병과 정신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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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44년 경기고녀 졸업식 때 서울 재동교정에서 학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오른쪽 둘째가 필자.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4년. 꿈 많은 '문학소녀'였던 나는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나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일본 유학이 전면 금지된 것이다. 관부(關釜) 연락선이 어뢰를 맞아 침몰했고, 뒤 이어 이화여전.숙명여전이 폐교돼 학교 현판 대신 '지도원 양성소' 간판이 내걸렸다. 식량난도 극심했다. 물물교환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집집마다 닥친 더 큰 걱정거리는 다른 데 있었다. 졸업하는 남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여학생들은 군수공장이나 정신대로 끌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갑자기 서울 양갓집들 사이 혼담이 쏟아졌다.

여자는 시집을 가면 일단 징집 대상에서 제외됐으며, 남자들의 경우 전쟁터로 끌려가더라도 총각 귀신 만은 면하게 해주려고 부모들이 혼사를 서두른 것이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학생인 내게 어느 갑부의 장남, 어느 대감집 손자라는 총각들로부터 혼담이 들어왔다. 문학을 좋아하고, 주말이면 극장을 순례하며 독일영화에 푹 빠져있던 나는 빗나가고 있는 내 인생을 한탄했다. '아예 수녀원으로 들어가버릴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 퇴역 육군 소좌 댁에서 중매가 들어왔다. 신랑감이 지내고 있는 곳이 도쿄 부근이라는 사실에 내 귀가 솔깃해졌다. 그는 도쿄에서 기차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고덴바라는 작은 도시에서 중포부대 교관으로 복무중인 육군 대위였다. 중학교 4학년 때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엘리트 청년으로, 뛰어난 미남이라고 했다. 조상 대대로 장군과 군인을 지낸 무인 집안이라고 했다.

17세 철부지였던 나는 '군수공장으로 끌려가느니 이 기회를 잡아서 일단 일본으로 가보자. 어떡하든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겠지'하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군인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도 못한 채, 나는 그저 도쿄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집갈 결심을 했다.

혼사가 오가는 중에 본인이 울고불고만 하지 않으면 승낙하는 것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혼담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신랑감 사진이 왔다. 소문대로 그는 꽤나 미남이어서 오히려 부담이 될 정도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미남을 믿지 않는 편이다. 어쨌든 나도 상대방에게 사진을 한 장 보내야 했다. 나는 밤을 새워 하얀 물방울 무늬가 있는 감색 벨벳의 어머니 치맛감으로 예쁜 양장 한 벌을 만들었다. 이미 정자옥(지금의 신세계백화점)에서 옷과 어울리는 감색 펠트 모자를 사 놓았고 구두도 맞췄다.

여학생 티가 나는 갈래 머리에 모자를 쓰고 흰색 칼라가 달린 감색 벨벳 원피스 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으러 가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찍은 그날의 사진 한 장이 내 일생일대의 악연이 될 줄이야.

노라·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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