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국토박물관 순례] 4. 합천 영암사터 쌍사자석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국토박물관 순례의 진수는 뭐니뭐니 해도 아무런 해설 없이 그 자체로서 예술적 감동을 불러 일으켜주는 문화유산의 명작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고 가슴이 설레며 깊은 감흥에 젖어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유물은 순례의 기쁨을 넘어 민족적 자부심까지 일으켜 준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黃梅山) 영암사터는 내가 고이 간직해온 답사여행의 비장처다. 20년전,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내 친구의 친구인 한영희(韓永熙)가 국립 진주박물관장을 지내고 있을 때 그는 내게 요담에 서부경남에 오면 꼭 영암사터를 들러보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 이듬해 늦가을, 절터앞 해묵은 느티나무 낙엽이 가랑비처럼 흩날릴 때 찾아간 영암사터는 마치 폐허에서 만나는 환상의 나라 유적 같았다.

아름답고 장대한 황매산의 백옥 같은 화강암 연봉들을 배경으로 높직한 석축 위에 당당히 서있는 쌍사자석등을 보면서 무슨 폐사가 이렇게 화려한 느낌을 줄 수 있을까 그저 놀랍기만 했다.

영암사는 언제 창건되어 언제 폐사로 몰락했는지 알려주는 기록이 없다. 다만 용케 전해지는 '영암사 적연국사(寂然國師) 자광탑비(慈光塔碑)'의 고탁본(서울대학교 도서관)이 하나 있어 11세기 고려 현종 때 적연국사(932~1014)가 말년에 여기를 찾아와 조용히 입적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영암사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보물 480호), 쌍사자석등(보물 353호), 비석을 잃어버린 돌거북받침(보물 489호) 등 세개의 보물은 모두 9세기 하대 신라를 대표하는 명작들이어서 통일신라 말기 이 지방 호족의 발원으로 창건된 선종 사찰로 추정된다. 고려 때만 해도 나라의 국사가 주석할 정도로 이름을 얻었으나 아마도 조선 초 폐불 정책과 함께 오지 중의 오지인 이 절은 폐사되고 만 것 같다.

영암사터는 무엇보다 절집의 위치 설정, 건축 용어로 사이트(site)가 뛰어나다. 우리나라 절집들은 대개 세 가지 유형으로 화순 쌍봉사처럼 깊은 산중의 절, 영주 부석사처럼 드넓은 조망을 갖고 있는 절, 부안 내소사처럼 아름다운 배산(背山)을 갖고 있는 절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런데 영암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한 몸에 지녔다. 합천.산청.거창을 경계짓는 황매산 깊은 골, 모산재라는 화강암 골산을 배산으로 하고 높직이 올라 앉아, 겹겹이 물러나는 아득한 산자락을 바라보는 조망을 갖고 있다. 이 절집의 이름이 불교 용어를 택하지 않고 신령스러운 바위산을 이끌어 영암사라 했음도 이런 위치 설정에 있었을 것이다.

영암사의 가람배치는 황매산을 등에 지고 동서 일직선상의 3단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석축의 돌쌓기는 반듯한 네모돌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대못 모양의 팔뚝돌을 끼워 안으로는 역학적으로 힘을 받게 하고, 밖으로는 구조적인 튼실함을 갖고 있다. 그것부터 이 절의 건축에 얼마나 공역을 들였는지 남김없이 알 수 있는데 금당의 석단에는 4면에 모두 여덟 마리의 사자를 실감나게 돋을새김하였고, 불단 기초석에는 팔부중상(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장)을 정교하게 조각했다. 또 금당 계단의 난간은 가릉빈가(극락정토에 산다는 상상의 새)를 날개 달린 여인의 어여쁜 춤사위 모양으로 장식했다. 그 모두가 마치 황매산의 화려함에 결코 지지 않겠다는 조형의지로 보인다.

그런 중 황매산과 영암사의 아름다움을 둘이 아닌 하나로 묶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은 금당 앞 쌍사자석등이다. 화강암 통돌을 깎아 두 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데 다리와 다리 사이, 팔뚝과 팔뚝 사이는 돌을 뚫어 공허(空虛)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로인해 입체감과 사실성이 뚜렷하고 사방 어디에서나 쌍사자의 몸짓을 읽을 수 있다. 그 조형적 구성력은 거의 현대적인 것이다.

20세기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가 현대조각에서 이룩한 최고의 공헌은 기존의 조각들이 매체의 양괴감을 나타내는 데 급급한 것을 벗어나 공허 공간을 창출했다는 것인데 여기 이름 없는 신라의 석공은 1천년 전에 이렇게 조각적으로 실현했던 것이다.

법주사의 쌍사자석등(국보 5호), 광양 중흥산성의 쌍사자석등(국보 103호)의 전통을 이어받은 영암사 쌍사자석등은 그것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절묘한 석축 때문에 더욱 제 빛을 발하고 있다. 금당의 석축을 쌓으면서 석등이 앉을 자리를 철(凸)자형으로 돌출시켜 아래쪽에서 보면 이 쌍사자석등은 높이 3m가 넘는 석축 위에서 마치 황매산 연봉들을 호령하는 대대장 혹은 교향악단의 지휘자 같은 당당함을 갖추게 된 것이다.

석등을 받치고 있는 석축 양옆의 돌계단은 통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깎아 여섯 단의 디딤돌을 발뒤꿈치가 허공에 뜬 채로 조심스럽게, 그리하여 경건한 자세로 오르게끔 했다. 그 기발한 발상을 보면서 직지사 성보박물관장인 흥선스님은 영암사터 답사기를 쓰면서 "밉살맞을 정도로 귀엽다"고 했다. 나는 이 무지개 돌계단의 곡선을 무어라 표현할 줄 몰라 그냥 예쁜 호(弧)를 그린다고 말하곤 했는데, 한번은 공과대학 교수가 내 강의를 들은 뒤 사인(sine) 12도의 곡선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영암사터 답사는 자연스럽게 금당 한쪽에 있는 조사당터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조사당터 양옆에는 한쌍의 돌거북비석받침이 있다. 이 역시 하대 신라와 고려 전기를 대표할 명품이다. 그중 하나가 적연국사 비석받침이고 또 하나는 이 절을 창건한 스님의 것이 분명하다. 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올 때면 두 돌거북비석받침의 양식적 차이와 시대 판별법을 실험 실습하듯 강의하고 시험도 본다. 어느 것이 더 오래된 것일까? (정답은 안내판에 모호하지만 맞게 쓰여 있다.)

영암사터로 가는 길은 합천에서 삼가를 거쳐 가회로 들어가는 것이 원래의 길이지만 대통(대전~통영)고속도로를 이용하자면 산청 원지에서 들어가는 것이 빠르고, 낭만적으로 가려면 합천호를 끼고 산상의 호반길로 갈 수도 있다. 근래에는 거창 양민학살의 현장인 신원면 과정리에서 산청으로 넘어가는 길이 뚫려 나는 주로 이 길을 이용한다.

이 길로 가자면 산청군 신등면의 단계(丹溪)라는 마을을 거치게 되는데 이 묵은 동네에는 순천 박씨, 안동 권씨의 고가(古家)가 예닐곱 채 있고 집집마다 단계천 냇돌로 쌓은 돌담길이 정말로 정겹고 예스럽다. 어떻게 이 깊은 산골에 이처럼 전통을 귀중히 간직해온 동네가 있을까 신기롭고 고맙기 그지없다. 마을 한쪽 초등학교는 세 칸 솟을대문이 정문으로 세워졌고 대문엔 '삭비문(數飛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배우고 익힌다는 습(習)이란 어린 새가 자꾸(數) 날갯짓(飛)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참으로 대단한 전통의 옛 고을이다.

언젠가 영암사터 답사 때 진주가 고향인 한 열성회원이 내게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녀는 경주.안동.해남.서산.양양 등 답사의 명소를 갈 때마다 내 고장엔 왜 저런 환상적인 답사처가 없을까 늘 주눅들어 왔는데 이제는 큰소리치게 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서부경남 문화유산의 자존심이 여기에 있다."

유홍준 교수 <명지대 미술사학과.문화예술대학원장>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10월 31일자 23면에 실린 '국토박물관 순례-모리재(某里齋)와 거창 위령비'편 중 곽종석의 호 '면우'의 한자 표기 宇를 제작상의 실수로 傘宇로 잘못 표기했기에 바로잡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