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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로부터의 탈출/송진혁(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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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의 희망의 새해는 뜻밖에도 부패의 융단폭격으로 무참하게 일그러지고 있다. 정초 각계의 고명한 인사들이 거룩하게 다짐한 새해 설계와는 실로 너무나 엉뚱하게 올해 우리가 가장 먼저,가장 심혈을 기울여 해결해야 할 일은 통일도 경제성장도 선진국도 아니요,바로 「부패로부터의 탈출」임을 가차없이 강요하고 있다.
작년말 검사와 깡패,의원과 깡패간의 검은 유착이 던져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한 가운데 새해들어 의원들의 뇌물외유,전국대학을 뒤흔든 입시부정 파동,돈으로 자격이 오간다는 의료계비리설이 때마침 터진 걸프전과 함께 연일 우리 머리를 강타하더니 급기야 정·관·경유착이라는 「수서의혹」이 터져나왔다.
아직 진상이 가려지지 않은 의혹을 두고 섣불리 누구를 단죄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지만 청와대비서실·여야정당·국회가 의혹설의 주역들이 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지경이다.
이쯤되면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국회의원·검사·교수·예술가·청와대·검찰·여당·야당·국회… 이중 도덕적으로 성한 사람이 누구며 도덕적으로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또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사람마다 불가피하게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온세상이 다 해먹는데 자기만 바보처럼 못해먹고 못사는게 아닌가 하는 불신과 증오와 허무주의가 아니겠는가.
새상이 이쯤되면 누가 도둑이고 누가 도둑을 잡는 사람인지 구별도 애매해진다. 권력층·지도층이 부패의 늪에 빠져있다고 믿는 이상 잡혀가는 도둑은 항상 자기는 억울하다,재수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범죄에 대한 반성도 후회도 나올리 없다. 그것은 국회의원까지도 마찬가지다. 모든 국회의원이 다 뇌물외유를 하는데 왜 자기들만 문제삼느냐고 그들은 항변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되면 행정당국이나 지도층이 아무리 법과 질서를 지켜라,시민의식을 발휘하라고 외쳐봐야 공염불이다. 아무리 좋은 소리라도 그것이 신용없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힘이 없는 법이다.
지금 부패의 융단폭격은 우리 사회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처하고 반격하는 조직적인 노력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실망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부패는 온국민이 저항하고 시민운동도 일어나야 할 일이지만 부패와 싸우고 몰아내는 1차적 책임은 당연히 정부에 있다. 그러나 지금 정부는 부패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자정의지에 있어 거의 믿음성을 주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 비리에 대한 수사는 항상 어정쩡하고 내부의 부패에 대한 처리는 늘 미지근하다. 부패의 먹이사슬을 끊어야 할 각종 인사에서 끼리끼리 해먹는다는 인상을 씻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6공 정부로서는 이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 오욕의 5공청문회에 이어 자칫 6공청문회가 열릴 수도 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이번 수서의혹이 개운하게 처리되지 못하면,무역특계자금 의혹을 말끔히 씻지 못한다면 다음 정권의 성격과 정권교체기의 사회상황에 따라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미리부터 대비하고 한을 남기는 일이 없도록 서둘러 모든 화근과 불씨를 미리미리 제거,정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벌써 세간에는 ○○의혹,△△의혹 따위의 6공 비리설이 떠돌아 다니지 않는가. 야당도 이런 점에서 별로 예외가 될 수 없다.
뇌물외유·이권개입·자금조성 등이 언제 어떤 계기로 청문회나 사직에 의해 드러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원래 권력의 부패가 야당에 의해 감시·폭로되고 규탄·견제되는 것이 상례인데 요즘와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자웅을 가릴수 없는 판이 됐으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오늘의 이 구조화된 부패문제는 그 원인진단이야 어떻든 정부와 정치에 의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수 밖에 없다.
정부가 내부에 오염되지 않은 영역을 확보하고 자정과 공권력의 엄격한 집행을 통해 깨끗한 영역을 조금씩 확대해 나가는 길 뿐이다. 깨끗한 쪽이 오염된 쪽을 칠때라야 도덕성과 신뢰성이 나오는 법이지 오염으로 오염을 쳐봐야 도로아미타불이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6공정부는 단임정권의 강점을 십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재선을 생각할 수 없는 단임정권으로서는 퇴임후에 대비하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의 유지·확대에 정치력을 쏟아넣을 필요가 없다.
임기중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퇴임후 최선의 보장이 될 것이다. 전두환씨 비극의 가장 큰 원인이 퇴임후에 대비해 무리를 저지른데 있음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다음으로 시급히 할 일은 기왕에 드러난 정치권의 부패,비리케이스부터 명쾌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개혁 없이 반부패전쟁을 이길 수는 없다. 질서를 세우는 쪽의 대표가 정치권인데 정치권의 오염을 그대로 두고 일반 사회의 오염을 칠 수는 없는 일이다.
의원직을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게 하고 기소해야 할 사람은 기소하고 제명해야 할 사람은 제명해야 한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내부의 오염요소를 그대로 안고 가다가는 차기집권은 고사하고 그나마의 얄팍한 지지율도 봄눈 녹듯할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에 이런 최소한의 반부패교두보를 확보한 다음 할 일은 가차없고 단호한 법집행 뿐이다. 필요하면 특별입법도 함직하다.
대만이 과거 극심한 부패의 늪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 것은 친척까지 사형·무기에 처한 단호하고 무자비했던 장개석의 의지에 크게 힘입었다는 사례도 있다.
부패의 융단폭격을 받고만 있을게 아니라 이제부터 부패를 융단폭격해야 한다.<편집국장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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