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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씨, 새 소설서 역설적으로 현 정권 맹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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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삼치회(三癡會)는 세 종류의 구제받기 어려운 바보(三癡)들이 모였다는 뜻이지. 안기부 대북 파트, 검찰 시국공안, 그리고 경찰 대공분실 간부로 옷 벗은 사람들…. 조국과 민족을 위한답시고 못된 짓만 한 얼간이들, 아니 단독정부 수립으로 분단을 주도한 뒤에도 국민을 학살하고 착취한 것으로 일관한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 대한민국에 빌붙어 감히 위대한 지도자 수령 동지께 맞서 온 …' .

미국에 체류 중인 작가 이문열(57.사진)씨가 386 운동권과 현 정부의 실정을 맹렬히 비판하는 소설을 발표했다. 소설 제목은 '호모 엑세쿠탄스'. 계간지 '세계의 문학' 봄호부터 연재돼 최근 출간된 겨울호에서 완결된 장편소설이다.

◆ 혹독한 정치 비판=소설은 386 운동권 출신 신성민을 둘러싼 이야기다. 소설에서 무허가 비닐하우스촌에 사는 보일러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보일러공을 살해하는 주사파 출신 운동권 조직 '새여모'는 적(敵)그리스도처럼 묘사된다. 결국엔 보일러공을 따르던 무리가 새여모 대표를 처단한다. 호모 엑세쿠탄스는 '처형자로서의 인간'이란 뜻이다.

사실 소설은 연재 첫회부터 논란을 불렀다. 작가는 '인터넷 광장의 익명성에 숨어 밖에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얼치기들이 젊음과 세대를 횡령한다' 등의 구절에서 현 정부를 비판한 바 있다. <본지 3월 22일자 6면>

하지만 이번엔 비판이 훨씬 구체적이다. 현 정부의 인사 문제를 지적하는 구절부터 보자. '고시 합격보다 학생운동 경력이 출세하고 고위직에 이르는 데 훨씬 빠른 지름길' '시민운동이 가장 효율적인 엽관(獵官)의 수단이 되어가고, 정권이 임명할 수 있는 관변 요직은 감투에 눈먼 홍위병들의 전리품으로 변해가는 세상'.

'오천사(五賤社)'라는 것도 등장한다. 김지하 시인이 '오적'에서 조롱했던 장관.재벌.국회의원.장성.고급공무원을 가리킨다. 소설에선 다섯 천덕구니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오천사는 앞서 역설적(逆說的)으로 묘사한 삼치회와 함께 한야(寒夜)대회라는 시국 토론회를 연다.

'새로 주인이 된 정권을 위해 파렴치하게 짖어 대는 것을 진보로 아는 친여 매체'라고 일부 언론을 겨냥하거나 '남한의 햇볕이 그들의 옷을 벗기기 위함이란 걸 빤히 알면서 김정일 정권이 이른바 선군(先軍)정치의 옷을 벗어 던지고 개혁.개방으로 나올까?'라며 햇볕정책을 문제삼기도 했다.

◆ "나는 소설을 썼다"=그러나 이씨는 6일 전화통화에서 "나는 소설을 썼다"고 잘라 말했다. 이씨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불안하고 불길하게 감지되는 하나의 흐름을 썼을 뿐"이라며 "작가의 주장을 펼친 게 아니라 사회에 존재하는 한 극단 세력의 주장을 문학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단은 2001년 이문열씨의 홍위병 발언을 떠올리며 정치적 파장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진 문인은 "한국 정치에 염증을 느껴 미국에 간다던 작가가 지금은 정치적 소설로 정치활동을 시작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씨는 "나는 현재 그 어떠한 현실 정치 세력과도 관계 없으며 이 소설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도 경계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씨는 지난해 12월 미 버클리대학 체류작가 자격으로 출국했다. 원래 1년 계획이었지만 1년 더 미국에 있기로 최근 결정했다. 출국할 때 그는 "본의 아니게 정치에 얽혔다"며 "문학화를 회복하기 위해 미국으로 간다"고 밝힌 바 있다. 소설은 내년 초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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