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평양 모란봉극장서 순수한 민족극 무대에 서보았으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지금은 고등학교 학생인 우리아이들이 어렸을때 했던 질문을 나는 잊을수가 없다.
TV에서 반공드라마를 방송하고 있을 때였다. 인민군이 나오고 간첩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나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엄마, 저 사람들은 나쁜 나라 사람들이야?』 아이들의 천진스런 질문에 나는 갑자기 가슴이 메어왔다.
『그래 저 사람들은 아주 나쁜나라 사람들이야. 우리나라 국군도 많이 죽였고 죄없는할아버지·할머니·엄마·아빠에게 총을 쏘았거든. 그러니까 원수야. 또 간첩이 나오면경찰서에 신고해야 하는거야』 그러나 이런말들은 입속에서 그냥 뭉개지고 말았다.『나쁜나라 좋은나라는 너희들 동화잭속에나있는거지. 어른믈이 사는 나라는 모두 나쁜나라란다. 서로가 힘을 자랑하며 남의 것을빼앗으려하거든』 이말 또한 입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날 그 반공드라마에 인민군역으로 출연한 탤런트는 평소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얼굴이었다. 인민군 복장을 하면 영락없이악한 인민군이 되고 대한민국 군복을 입으면 다시 선량한 국군이 되는 마술은 무슨연유일까, 게다가 영어도, 독일어도, 일본어도 아닌 우리말을 조금도 거침없이 주고받는데야 무슨 수로 금을 그을수 있단 말인가.
「90 송년 통일전통음악회」에서 평양 민족음악단의 공연을 보는동안 나는 울렁거리는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아, 드디어 이런 날이 오기는 왔구나.』말로만 듣던 인민배우·공훈배우가 직접무대위에서 민요를 부르고 단소며 목류금을 연주하고 통일의 노래 『우리의 소원』을 부르다니 꿈만 같았다.
비록 값비싼 비단옷은 아니지만 성의를다해 차려입은 꽃분홍 치마 저고리. 유난히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넘기고 거기에 반싹반싹 빛나는 머리장식으로여인네들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며 무대위에서 고운 음, 맑은 소리로 노래하던 북녘의 여인들이었다.
그동안 남북간의 스포츠 교류를 비롯해서정치인들의 정상급 고위회담·경제회담에 이어 문화교류까지 놀랄만큼 급진전된 상황을 경험하면서 이제 40년이라는 세월을 한겨울밤의 악몽으로 돌려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여러가지 부겅적인 시각도 물론 많겠지만 새해엔 좀 더 서로간의 열린 마음으로 만남이 이루어져 통일의 그날이 앞당겨지기를바란다. 그리고 이번엔 그들이 자랑하는 평양의 모란봉 극장에서 체제나 이념을 떠나 순수한 민족극의 무대를 기대해 본다. 나쁜나라가 아닌 좋은나라에 살기를 염원하면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