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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천제의 신하가 천마 훔쳐 내려온 곳|백두산 전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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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 산으로 민족혼의 축이 되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산은 신화 상으로 보아 한 민족의 소유로만 국한시켜 인식할 수 없는 존재였음을 시인할 필요가 있다.
흔히 백두산을 이르러 부함 산이라고 하는데 「불함」이란「신무」(신무)의 뜻이고, 이산은 「유신지산」이라 해서 그곳에 절대적인 신이 산다고 믿었다. 더욱이 산정에는 바다 같은 호수가 있어 주변 민족 간에 늘 동경의 대상이었고 이 산을 자국의 영 산으로 삼고자 했으며 이 같은 의식·무의식적인 민족심성은 각 국의 신화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나라마다 영토 주장>
필자는 내몽골·외 몽골을 조사한 후 연변으로 향했다. 백두산 입구에서 장백 폭포에 매료되어 원경을 찍고 있노라니 웬 젊은 중국 공안 원들이 몰러와 비디오를 뺏으려 했다. 난처한 처지에 있을 때 안내를 해주었던 연변의 구비문학연구가 김태갑 선생과 동행했던 중국인의 공작 증이 아니었더라면 곤란을 당할 뻔했다. 김 선생은 넌지시 얼마 전 알만한 한국인들이 무당을 앞세우고 몰려와 산신 굿을 하고, 게다가 한국 땅이라고 태극기를 꽂아놓고 가는 바람에 그 후부터 한국사람이라면 요주의 인물로 보고 있다고 귀띔 해 주었다. 성급한 애국자들 때문에 뒤에 간 사람이 피해를 본 경우가 필자만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김 선생은 웃으며 장백산은 나라마다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는 신화나 문헌적 전기를 다 갖고 있는 처지에 좀 지나친게 아니었는가 라는 어조였다.
바로 그 말이다. 만주족이나 우리 민족만이 신 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몽골 족까지 백석산신화를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간 문화의 친족관계를 따질 때 한민족 문화의 뿌리가 만주벌 어디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단하는 학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신화의 내용이나 구조상으로는 몽골신화에 더 가깝다고 본다. 몽골 족의 신화 속에 백두산이 신성공간으로 설정되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우리 학계에 거론된 바 없다. 우선 몽골 족과 만주족의 신화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몽골 족의 백두산 신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 하부라트(방포납특)가 하늘나라에서 인간세상으로 내려올 때 그는 하늘 천제의 말(마)을 훔쳐 가지고 내려왔다. 하부라트는 이 말을 끌고(타고) 흰눈이 하얗게 쌓인 백두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천제의 소(신우)도 잡아먹었다. 천제가 이 일을 알고 나서는 천사를 그곳에 파견해 하부라트를 잡아오라고 명했다. 천사들이 내려와 하부라트를 잡으려고 하자 그는 천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가 천제의 말을 훔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곧 하늘로 올라가 천제의 심판을 받을까 합니다. 그런데 제가 왜 천제의 소를 잡아먹었는가 하면 그 가죽과 뼈로 불상을 만들어 섬기려했기 때문입니다.』

<천제의 소 잡아먹어>
그러자 이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던 천사는 그의 행위가 가상하고 수긍이 가는지라 그를 잡지않고 도리어 놓아주었나. 그리하여 하부라트는 이내 소가죽을 구해 하나하나 조금씩 잘라 소 가죽끈을 만들어 이것을 소뿔에다 감았다. 그리고 사방의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 신은 다름 아닌「보목낙신(보목낙신)」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일러주기를 이 신을 성심 성의껏 잘 모시면 1년 내내 재해가 없고 편안하고 행운이 올 것이며 만사형통 할 뿐 아니라, 또 집집마다 기르는 가축들이 아무 탈 없이 번성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보목낙신은 하부라트가 처음 모신 신인 셈이며 이후 많은 중생이 잇따라 모셨다고 한다.
어원적으로 보아「보목낙」이란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한다. 첫째는 몽골어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강의 의미가 있어 보목낙은 천제의 변신 또는 천제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몽골인 들은 그 후부터 오늘날까지 몽골 제1신으로 모시고 있다.
보목낙신의 신체는 소뿔에 그려 집집마다 대문 옆에 걸어놓는다. 둘째는 보목낙이란 것은 지하 치를 매우 숭상하고 양을 기르는 독신 노인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상의 설화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한국의 단군신화와 마찬가지로 천신 계 신화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신화에서는 환웅과 환인이라는 부자간의 혈통이 존속하고 있으나 몽골의 하부라트는 천상에서 천제를 모시던 시신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설화자료에서 천제의 말을 훔쳐 달아났다고 하는 점이 주목을 끄는 대목이다. 즉 그는 하늘나라에서 천마를 훔쳐 타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백두산의 이름은 부함 산·백산·대 백산·사태 산·장 백산·수덕산·노 백산 이라는 이칭 이외에「개마 대산」이나 「마다 산」이라는 명칭이 있어 말과 무관하지 않은 산임을 알 수 있다. 천마총을 비롯해 우리민족의 서낭당 내부에는 마신저이 허다한데 「마」자가 들어있는 용어는 몽골 풍속과 관련이 깊다.
몽골 족의 백두산 설화에는 또 다른 동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소다. 그 소는 보통 소가 아닌 신우였다. 그런데 그 신우는 그 당시백두산 일대에 서식하는 동물이었다. 어찌 보면 말을 타고 내려온 민족이 소의 농경민족을 지배하게된 과정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속단하기 어려우나 이 신화는 불가사상, 곧 라마불교와의 습합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의 뿔을 상징적으로 모시는 티베트문화의 요소가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라마불교와도 밀접>
『계단국지』에는 「장 백산은 동남 천여 리에 있으며 그곳에는 백의관품이 계신 곳」임을 명시하고 있다. 원래 거란은 몽골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살고 있던 유목민족이었다. 고려 때 우리 민족과 거란족과의 갈등상황은 주지하는 바이거니와 이 문헌 내용으로 보아 그들의 신산 또한 백두산이었음을 추단 할 수 있다.
그러면 만주족의 백두산 신화는 어떤 것인가. 『동화록』이나『만주원류고』에 수록되어 있는 만주족 국조 신화인 누루하치의 탄생 담은 「천아선녀」「삼선녀」「천녀욕궁지」등을 담고 있다.
『장 백산 동쪽에 포고리 산이 있고 산밑에 연못이 있는데 포이호리라고 불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천녀 셋이 있는데 맏이는 사고륜이라 하고 둘째는 정고륜, 막내는 불고륜이라 했는데 어느 날 포이호리에서 같이 목욕을 했다. 목욕이 끝나자 신작(신작)이 붉은 과일 하나를 막내 옷에 떨어뜨렸다. 막내 선녀는 이를 입에 넣자 홀연 뱃속으로 들어간 후 이내 임신이 되었다. 그는 두 언니에게 내 몸이 무거워 날아오를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두 언니는 우리들이 선적에 들어 있지만 걱정할 것 없다면서 이는 하늘이 널 임신시긴 것이니 출산한 후 와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해주고 날아가 버렸다. 막내가 낳은 아기는 남자인데 태어나자마자 말을 잘 했고 형상이 특이했다. 아기가 크자 어머니는 주과를 삼키고 잉태한 사실을 일러주고 이름을 포고리옹순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러고는 하늘이 너를 낳게 하신 것은 난국을 평정해서 다스리라는 뜻이니 너는 이 물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라고 하며 작은 배를 태워 띄운 뒤구름을 타고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신령한 산으로 생각>
이 신화는 『만족민간고사선』에서는 세 선녀가 백우모의를 입고 천아(거위)로 변해 천궁을 떠나 아림산(백두산)에 내려온다는 내용이 제시되어 있고, 셋째 선녀가 비녀로 천지를 갈라 계곡을 만들어 아기를 배에 띄워 폭포로 나가게 했다고도 한다.
붉은 주과는 분명 태양을 의미하니 다름 아닌 천신계(천손계)신화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태조 신학에서는 물과의 관계가 더 깊어 수신의 가호아래 신화가 전개되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만주족신학의 시조는 수신 계일 가능성이 짙다는 말이 된다.
『금사』예지8에 보면 장백산은 「흥왕지지이고, 흥망지지」라고 표현하고 있어 얼마나 그들도 이곳을 중요한 성지로 여겼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산은 그야말로 한민족의 정신적인 축만 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동북아세아제민족의 축이기도 했다.
그런 중에서도 몽골의 백두산 설화는 신화의 틀로 보아 천신 계라는 점에서 한국의 것과 친연 관계가 있음을 주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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