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에 26조 금융지원…전기·용수·도로, 정부가 책임진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정부가 23일 발표한 ‘반도체 생태계 종합지원 방안’의 핵심은 26조원 규모 금융 지원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대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쥐여주는 내용은 빠졌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를 다루는 중소·중견기업을 돕는 데 초점을 맞췄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제2차 경제이슈점검회의에서 이런 내용을 발표했다. 산업은행이 17조원 규모 반도체 금융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해 반도체 기업이 공장을 신축하거나, 생산 라인을 증설하는 과정에서 낮은 이자로 대출받을 수 있도록 했다. 반도체 설계 전문기업인 ‘팹리스’와 소부장 기업을 지원하는 1조원 규모 ‘반도체 생태계 펀드’도 신설한다. 올해 일몰하는 연구개발(R&D)·설비투자 세액공제를 연장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주재한 제2차 경제이슈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주재한 제2차 경제이슈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그동안 반도체 업계, 특히 대기업이 요구한 직접 보조금 지원을 포함하느냐가 이번 대책의 최대 관심사였다. 미국·유럽연합(EU)·일본·대만 등 세계 주요국이 ‘쩐(錢)의 전쟁’으로 부를 만큼 대규모 보조금 지급책을 앞다퉈 꺼내 들고 있어서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금융·세제 지원이 보조금과 다를 바 없다”며 보조금 지원을 이번 대책에서 제외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제조 시설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나라는 투자 보조금이 있지만 (제조 시설을 갖춘) 한국·대만은 보조금이 없다”며 “세제 지원 부분은 어느 나라보다 인센티브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지원 방안의 70% 이상이 중소·중견 기업에 혜택을 준다”고 강조했다.

규제 완화, 인프라 지원도 신경을 썼다. 앞서 윤 대통령이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시간이 곧 보조금”이라며 전력·용수 공급, 기반시설 구축에 드는 시간을 단축하겠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번 대책에는 전기·용수·도로 같은 인프라 지원을 정부가 책임지고 빠르게 조성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TSMC는 착공한 지 20개월도 지나지 않아 신규 공장을 가동하는데 우리 기업은 신규 공장을 가동하기까지 평균 5~6년 이상 걸린다”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가동을 당기기 위해서라도 토지와 전력, 용수 등 인프라 지원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용수·도로 등 인프라를 국가가 책임지고 조성하겠다고 한 정부의 발표는 미래지향적인 건설적인 내용"(삼성전자), "대한민국 반도체 기업들이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디딤돌이 될 것"(SK하이닉스) 등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반도체 전쟁 격화로 위기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직접 보조금 지원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김흥종 고려대 국제학부 특임교수(전 대외경제연구원장)는 “세액공제는 수익이 난 뒤에야 세금을 차감해주는 장치라 부족하고, 선제적으로 투자를 촉진하려면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국내 소부장·팹리스 기업은 현금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조금 형태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반도체 업계에만 보조금을 주면 2차전지·바이오·디스플레이 같은 첨단 전략 산업과 형평성 시비가 있을 수 있다. 세수(국세 수입) 펑크에 시달리는 나라 살림도 고려해야 한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반도체를 국가 인프라로 본다면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건 정부의 당연한 역할”이라며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원을 대기업 특혜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국가 산업 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투자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