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한·미훈련 중단, 美 싱가포르 선언에 명문화했어야" [文 회고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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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전 대통령이 17일 공개한 외교안보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에 협상 동안 북한의 핵·장거리미사일 실험 유예에 대한 조치로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명문화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상호 간의 ‘레드 라인’(넘어서는 안 되는 임계점)에 비유하면서다.

문재인 전 대통령 회고록『변방에서 중심으로』. 김상선 기자.

문재인 전 대통령 회고록『변방에서 중심으로』. 김상선 기자.

“우리가 밥상 차려줬는데 반영 안 돼” 

655쪽 분량의 책에서 문 전 대통령은 2018~2019년 사이 이뤄진 남·북·미 간 연쇄 정상회담의 뒷이야기와 소회 등을 밝혔다. 문 정부에서 청와대 안보실 군비통제비서관·평화기획비서관, 외교부 1차관 등을 지낸 최종건 연세대 교수가 질문을 던지고 문 전 대통령이 답하는 대담집 형식이다.

문 전 대통령은 2018년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사상 최초로 북·미 정상을 마주앉게 하는 데 성공했다”며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부각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밥상을 많이 차려줬는데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서 아쉬웠다”고도 했다.

특히 한·미 연합훈련을 전략적 카드로 활용한 상황을 소개했다. 싱가포르 정상회담 전 북·미 간 대규모 한·미 연합훈련 중단에 대한 “구두 합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비핵화 협상 중 북한은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하지 않고, 미국도 대규모 연합 훈련을 중단한다는 게 골자로, 문 전 대통령은 “(북·미가)말로만 약속하고 공동 선언문에는 명시하지 않으면서 나중에 연합훈련이 계속 논란이 됐다”고 했다.

나아가 “그걸 선언문에 담았더라면 북한에서 핵실험을 하거나 ICBM을 발사할 경우 레드라인을 넘는 것이 되듯이, 미국 쪽에서도 대규모 연합훈련을 할 경우 레드라인을 넘는 게 되기 때문에 서로 합의 위반의 책임을 졌을 것”이라고 했다.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하지만 이는 사실상 이전부터 북·중·러가 요구해온 ‘쌍중단(雙中斷, 북의 핵미사일 실험과 한·미연합훈련 동시 중단)’을 사실상 수용하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합법적이자 방어적인 성격의 한·미 연합훈련을 북한의 불법적 도발과 같은 레드라인에 비유하며 등가로 맞바꾸는 게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문 전 대통령은 2019년 2·28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노 딜’에 대해서도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의 협상팀은 북한의 제안 내용 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다”고 했다. “(영변 폐기)약속을 내가 평양 남북정상회담(2018년 9월 18~19일)에서 받아왔기 때문에 (미국이)상응 조치만 강구하면 훌륭한 딜이 되는 것이었는데, (미국이)이를 거부할 것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또 이는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의 강한 반대 때문이었다며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 본인은 “나중에 내게 후회하는 말을 하며 미안해했다”고 설명했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연합뉴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연합뉴스.

문 전 대통령은 2018년 9·19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은이 먼저 영변 핵시설의 폐기를 제안했다고도 전했다. 또 “북한의 영변 시설은 비핵화 로드맵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라며 “영변은 유일한 플루토늄 생산시설이며, 삼중수소 설비도 유일하게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에서 고농축 우라늄 시설을 가동할 순 있지만, 영변을 폐기한다면 소형 핵탄두를 만드는 일이 불가능해진다고도 주장했다.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2018년 9월 6일)에서 “핵무기 연구소와 위성발사 구역의 완전한 중단 및 영변 핵물질 생산시설의 불가역적 폐쇄”를 제안한 데도 의미를 부여했다. “'핵무기 연구소'는 북핵의 두뇌 또는 컨트롤 타워로, 이는 ‘미래 핵’을 포기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또 영변 폐기 과정에서 미국 측 상주인원이 북한을 드나들면 북한에 임시 대사관 역할을 하는 미 측의 연락사무소가 개설될 것이라고도 했다.

다만 영변 핵시설에 대해서는 “북한 핵 역량의 80%”란 주장과 “50% 미만에 불과한 ‘깡통 시설’”이란 평가가 국제사회에서도 엇갈린다. 북한이 이를 협상의 단골 카드로 활용해온 이유다.

2008년 6월 영변 핵시설 냉각탑이 폭파되는 모습. 로이터.

2008년 6월 영변 핵시설 냉각탑이 폭파되는 모습. 로이터.

美 ‘리비아 모델’ 거론에 “강대국 오만” 

문 전 대통령은 북·미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자신이 트럼프와 손발을 잘 맞췄다고 자평했다. “내게는 동맹외교의 파트너로서 아주 잘 맞는 편이었다. 솔직해서 좋았다”면서다.

하지만 미국의 대북 협상 태도에는 원색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미국이 비핵화에 대한 김정은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취지다.

당시 김정은의 불만 섞인 발언도 전했다 “미국이 핵 리스트와 종전선언을 바꾸자고 했는데, 우리 보고 폭격 타깃을 먼저 내놓으라는 거 아니냐”, “신뢰하는 사이도 아닌데 시작도 하기 전에 폭격 타깃부터 내놓으라는 게 말이 되느냐” 등이었다. 북한은 “미국이 하사품이나 되는 듯이 종전선언 해줄테니 ‘핵 신고 리스트를 내놓아라’고 했다”고도 문 전 대통령은 전했다. 또 2018년 5월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에 대해서도 북한은 “(미국이)값을 눅게(싸게) 매긴다고 불만스러워했다”고도 했다.

특히 첫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이 북한을 향해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을 언급한 데 대해서는 “회담 상대(북한)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고 할까, 강대국의 오만 같은 것이 있었다”고 표현했다. 2018년 4~5월 볼턴 보좌관과 마이크 펜스 당시 부통령 등 트럼프 참모진이 북핵 폐기 방식으로 제시한 '리비아 모델'은 선(先) 비핵화-후(後) 보상을 뼈대로 하는데, 이후 아랍의 봄 시민 봉기로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처참한 최후를 맞자 북한은 이를 정권 붕괴와 동일시해왔다.

이와 관련, 문 전 대통령은 “북한에서 볼 때는 ‘이게 협상하자는 태도냐, 미국의 제안을 신뢰할 수 있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2018년 5월 방미 당시 트럼프에게 직접 리비아 모델은 안 된다는 취지로 말해 “전적인 공감과 동의”를 얻었지만, 참모들의 행동은 달랐다는 주장을 이어갔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서 악수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스트레이츠타임스. 연합뉴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서 악수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스트레이츠타임스. 연합뉴스.

북한이 당시 이에 반발해 거친 언사로 정상회담 재고려를 위협하자 트럼프는 곧바로 회담을 전격 취소하겠다는 서한을 김정은에 보냈다. 이에 대해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의 방미 후 귀국길에 취소 발표가 나왔다며 “우리로서도 상당히 화가 나고 황당했다”며 “취소를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에게 미리 알려줬어야지, 그 타이밍에 그런 식으로 발표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고 미국의 일방적인 행태에 분노가 컸다”면서다.

그는 북·미 정상회담 장소도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며 "미국의 아량이 부족했다"고 주장했다.

회고록에 주관적인 평가를 담는 것은 통상적이다. 다만 이는 불과 2년 전 퇴임한 전직 대통령이 동맹국을 향해 다소 감정 섞인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읽힐 우려가 있다.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책임을 주로 미국에 돌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당시 미 대통령이던 트럼프는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한다.

2019년 6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악수하는 모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바라보는 모습. 연합뉴스.

2019년 6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악수하는 모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바라보는 모습. 연합뉴스.

회담 직전 美에 “북·미만 종전선언해도 좋다”

문 전 대통령이 일관되게 추진한 종전선언과 관련, 당시 정부가 ‘한국이 빠진 북·미 종전선언도 괜찮다’는 입장을 미국에 전한 사실도 공개됐다. 이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끝내는 논의에서 한국이 스스로를 제외했다는 뜻이라 주객이 전도된 맹목적 종전선언 추진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문 전 대통령은 싱가포르 정상회담 전날인 2018년 6월 11일 트럼프와의 통화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잘 될 경우 원한다면 회담이 끝난 후 내가 그 자리에 합류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고 전했다. “원한다면 3국 간에 종전선언을 하거나 종전선언을 논의할 수도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 “원한다면 언제든 갈 수 있도록 그날 일정을 비워놓고 기다리겠다고 알려줬다”며 “실제로 일정을 비우고 지켜봤는데, 미국에서 가타부타 아무런 답이 없었다”고 했다.

이에 대담자인 최 교수는 “회담 직전 안보실이 미국에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는 미국과 북한끼리라도 종전선언을 해도 좋겠다는 것”이었다고 소개했다.

남북은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에서 연내 종전선언에 합의했지만, 실질적 진전은 이뤄지지 않은 채 국내외적 논란으로 이어졌다. 종전선언의 법적 구속력이나 무게감 등을 놓고 찬반도 크게 엇갈렸다. 북한의 비핵화 조치 없는 종전선언은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컸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노동신문. 뉴스1.

2018년 6월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노동신문.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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