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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선데이] 5월의 참회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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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호 29면

나태주 시인

나태주 시인

누가 언제부터 말해 왔는지 모르지만,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른다. 그만큼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귀하며 또 모성적인 사랑까지를 포함한 계절이란 의미일 테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르는 것은 5월이 꽃 피는 계절이라 그런 게 아니고 신록의 계절이라서 그러지 싶다. 신록은 나무에 나는 이파리나 땅에 자라는 풀의 푸르름을 말한다. 과연 5월이면 신록이 장관을 이룬다. 그러기에 신록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찬사도 있다.

그런가 하면 5월을 또 가정의 달이라 부른다. 유독 가정과 관계가 있는 날들이 5월에 집중되어 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모름지기 1년 중 하루를 무슨 무슨 날로 이름을 지어 기념하는 것은 그날의 주제나 대상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나로서도 이 가운데 하루도 눈감고 지날 날이 없다.

가정의 달에 돌아보는 내 모습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져주고
남들에겐 말하면서 나는 못했네
계절의 여왕 앞에 눈 감고 싶어

ON 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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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자식을 낳아서 길렀고 지금도 손자 아이들이 어린이 수준을 면치 못했으니 어린이날이 마음에 걸리고, 아직도 98세 아버지가 노인병원에 계시니 어버이날이 무심치 않고, 초등학교 교원으로 43년 동안이나 일하다가 정년퇴임한 사람이니 스승의 날을 눈감을 수 없고, 성년의 날은 그렇다 쳐도 부부의 날은 더욱 마음에 부담이 된다. 나는 과연 그러한 날들에 맞도록 살았는가 반성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가정은 남녀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면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가장 소중하면서도 기초적인 사회 조직이다. 인류의 번성과 발전의 보루이며 행복과 안정감을 주는 보금자리이다. 흔히 들어본 말 가운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다. ‘가정이 화목하고 편안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란 뜻을 지닌 말이다. 그만큼 가정의 평화와 안정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가정의 화목함. 나는 과연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는가? 나는 과연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과연 나의 가정은 지금도 여전히 화목한가? 나는 가정의 화목이란 말 앞에 목이 메고 가슴이 탄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이 필요할 것이다. 우선은 서로를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하리라. 그렇지. 상호존중의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상호 배려심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런 가운데 참을성도 있어야 할 것이야.

그런데 나는 어땠는가? 어려서 부모님에게 어떠했으며 자라서 또 부모님에게 어떠했는가? 한 여자와 결혼하여 살면서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했으며 배우자에게는 어떻게 했는가? 돌이켜 보아 하나같이 낙제점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진다. 더구나 학교 선생으로 일하면서 제자들에게는 또 어땠는가. 아, 차라리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다.

자식으로서도 부모로서도 배우자로서도 선생으로서도 온통 결함투성이인 이 늙은 남자를 어찌해야만 좋단 것인가! 부끄럽고 부끄럽다. 부끄럽다는 건 창피하다는 것과는 다른 마음이다.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이 부족하거나 잘못되었을 때 느끼는 마음이다. 참괴(慙愧)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감히 맹자의 삼락(三樂) 가운데 두 번째 나오는 그 말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그 부끄러움에 빗댈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인 것이다.

가정의 달에 내가 가장 부끄러운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아들아이에게 좋은 아버지 노릇을 못해 참으로 후회스럽다. 스스로는 부모의 일로서 ‘낳아주고 길러주고 가르쳐주고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져주고’가 있다고 강연 시간에 남들에게는 잘도 말하면서 정작 나 스스로 그것을 잘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져주고’를 잘하지 못한 것이다.

스스로 성격이 급박해서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조곤조곤 설명하고 동의받고 그러지를 못했다. 일관되게 내 얘기만 하려고 했고 내 주장만 강요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나의 말을 듣지 않게 된 것이다. 이른바 훈계(訓戒)가 안 들어간 것이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선배나 현자의 훈계가 필요하다. 훈계가 안 들어간 인간은 졸렬하고 멀리 꿈을 가질 수 없다. 마음속에 별을 가질 수 없음도 바로 이 탓이다. 정말로 나는 계절의 여왕 5월 앞에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다.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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