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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 재능과 일신의 안위, 조국 광복에 바친 헤이그 밀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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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호 26면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④ 보재(溥齋) 이상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의 유언이다.

선생은 1870년(고종 7년) 충북 진천에서 선비 이행우의 장남으로 태어나, 7세 되던 해에 경성 장동(현 명동)에 사는 동부승지였던 인척 이용우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후일 일가 6형제가 전 재산을 팔고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회영·이시영과 이웃해 살면서 한문과 신학문, 영어·불어·러시아어 등을 함께 공부하게 된다. 이시영은 “총명탁월한 두뇌와 이해력에는 같은 학우들이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모든 학문을 독학으로 득달하였다”라고 회고했다. 20대에 율곡을 계승할 학자로 평가받았고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의 학자 중에 제일류이니…성리학과 문장 그리고 정치·법률·산술 등의 학문이 모두 뛰어나고 풍부하다”고 전했다. 수리·과학까지 섭렵한 선생은 1898년 수학책 『수리』를 쓰고 이어 최초의 수학교과서 『산술신서』를 저술해 근대수학을 개척했다.

을사늑약 체결되자 종로에서 자결 시도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 회담에 고종 황제의 특사로 파견돼 일제의 국권침탈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린 보재(溥齋) 이상설 선생. [중앙포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 회담에 고종 황제의 특사로 파견돼 일제의 국권침탈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린 보재(溥齋) 이상설 선생. [중앙포토]

25세 되던 1894년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인 갑오문과에 합격하고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 한성사범학교(서울 사대전신) 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으로 관리의 길은 길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 보름 전 의정부참찬에 보임되어 조약체결을 극구 반대하였으나 일제가 강행하자 고종에게 순사(殉社·사직을 위해 죽음)로 비준을 거부하라 상소했다. 이후 벼슬을 던지고 늑약파기투쟁에 나섰고 민영환 자결 후 종로의 군중 앞에서 “국가에 충성치 못하여 나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만번 죽어도 마땅하다”며 자진을 시도하다 유혈이 낭자해 들려나갔다.

을사늑약으로 선생의 인생행로가 크게 바뀌게 되는데, 1906년 망명을 결심하고 이동녕과 함께 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의 연길현 용정으로 간다. 북간도와 서간도는 19세기말 이후 흉작 등으로 이주해 온 한인과 망명한 항일운동가들이 많이 살았고 용정은 북간도의 중심이었다. 선생은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으로 ‘서전서숙’을 세웠는데 독립운동을 위한 최초의 신교육학교다. 선생은 이동녕·정순만 등과 함께 직접 교단에서 역사·지리·수학·법률 등을 가르치고 반일민족교육의 선봉에 섰다. 이 학교는 1년여 만에 문을 닫게 되지만 후일 신흥강습소, 명동학교 등 많은 항일 민족학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헤이그 밀사 이준·이상설·이위종(왼쪽부터).

헤이그 밀사 이준·이상설·이위종(왼쪽부터).

1907년 러시아 주도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담이 열리게 되자 일제의 불법외교권 강탈행위를 알리기 위해 고종의 특사를 파견하게 되는데 선생이 정사에, 이준·이위종이 부사에 임명된다. 선생은 망명 전인 1905년에 이회영 등과 특사파견 문제를 이미 은밀히 논의·진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선생과 이준은 시베리아철도편으로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전 러시아주재 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과 합류한 후 6월 말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의 극렬한 방해공작 끝에 회의참석이 무산되고 만다. 그러나 특사들은 전 세계에서 모인 언론인들에게 일제의 부당한 국권침탈의 실상을 생생히 알렸다. 이 와중에 48세 이준은 근심과 울분으로 분사(憤死)했다. 이준은 헤이그의 한 묘지에 묻혔으나 1963년 서울 수유리 애국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선생과 이위종은 헤이그를 떠나 구주와 미주에서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구국외교를 전개한다. 일제는 밀사사건 후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 즉위 후 1908년 궐석재판을 열어 이상설은 사형,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후 선생은 고국 땅을 다시는 밟지 못하게 된다. 미주본토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선생은 1909년 하와이로 건너가 미주한인단체를 통합해 ‘국민회’를 결성하고 국민회 결의로 연해주지역 독립운동을 위해 떠난다.

연해주는 한인동포가 많고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자립하고 있었으며 러시아정부도 우호적이어서 1차 세계대전 전 해외독립운동의 중요거점이었다. 선생은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을 위해 국민회의 지원으로 유학자 이승희 등과 함께 북만주지역의 봉밀산 일대 황무지를 매입해 ‘한흥동 마을’ 건설에 나섰다. 이 마을은 동포의 생활터전과 독립운동기지 역할을 했으나 마적의 행패 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1910년 접어들면서 국내 의병이 거의 진압되고 연해주 의병의 국내 진공작전도 실패에 이르자 선생은 의병장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연해주와 북간도의 의병부대를 통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했다. 또한 도총재 유인석과 함께 퇴위한 고종에게 군자금지원과 연해주파천을 상소하지만 러시아가 일제와의 관계 속에서 망명을 좌절시키고 13도의군 활동도 중지시켰다.

국치 직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결성하고 “우리는 차라리 2천만의 두려(豆?)를 끊을지언정 5천년 래 조국, 이는 버릴 수 없다”고 취지문을 남긴다. 성명회는 연일 집회를 열어 병탄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선생이 기초하고 8624명이 서명한 선언서를 각국 정부에 보냈다. 선생은 이 일로 체포되어 유배당했지만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으로 돌아와 최재형·이동휘 등과 함께 여러 계열의 독립운동가들 간 통합과 연대를 위해 ‘권업회’를 창설하고 실질적 운영기관인 의사부 의장에 선임된다. 권업회는 독립운동기관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다양하게 활동했고 1912년 권업신문을 창간, 신채호가 주필을 맡아 언론을 통한 투쟁을 이어갔다. 1913년 선생이 권업신문의 사장 겸 주필에 취임하여 활동했다.

“낙망 말고 분발” 남기고 47세에 순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에 있는 이상설 선생 생가. [사진 김석동]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에 있는 이상설 선생 생가. [사진 김석동]

1913년 이동휘·이동녕 등 지도자들과 권업회 조직을 기반으로 신한촌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선생이 정통령, 이동휘가 부통령에 선임되었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수립된 최초의 망명정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한광복군정부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해산 당했다.

이렇게 러일동맹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상하이로 가서 박은식 등과 함께 1915년 ‘신한혁명당’을 조직한다. 선생이 본부장에, 박은식이 감독에 선임된 신한혁명당은 베이징에 본부를 두고 제정체제인 중국·독일과의 연합과 고종 망명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였으나 국제정세 변화와 관련인사 체포로 무산된다.

망명 후 10년간 끊임없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선생은 연이은 독립투쟁이 무산되고 오랜 망명생활로 몸마저 쇠약해져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온다. 건강이 크게 악화된 선생은 1916년 우스리스크로 옮겨와 투병하던 중 “우리나라에 국권회복의 기회가 올 것이니 모두들 낙망 말고 분발하라”는 유지를 남기고 1917년 47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동지들은 선생의 유언대로 시신과 유품을 화장하여 수이푼강(수분하, 라즈돌나야강)에 그 재를 뿌렸다.

이상설 선생은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구국외교의 선봉장이자 항일운동, 민족교육, 망명정부수립, 독립전쟁추진 등 국권회복투쟁의 지도자였다. 후일 옥중의 안중근은 선생에 대해 ‘세계 대세에 통하고 애국심이 강하고 교육발달을 도모하여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이라고 썼다.(안중근 평전-김삼웅)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이후 진천 생가가 복원되어 숭모비, 숭렬사,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은상이 쓴 비문은 ‘혼이라도 고국에 돌아와 우리의 위로 웃고 받으옵소서’라 마무리 하고 있다. 1996년 숭렬사 경내에 선생과 부인을 합장한 초혼묘가 마련되었고 2001년 수이푼강변에 ‘이상설 선생 유허비’가 세워졌다. 2024년 3월 진천에 기념관이 준공되어 7월 개관 예정이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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