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은미의 마음 읽기

튀르키예의 독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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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최은미 소설가

최은미 소설가

튀르키예의 앙카라에서 열린 도서전에 다녀왔다. 중편소설 『어제는 봄』이 작년에 튀르키예에서 번역 출간이 되었는데 이번 도서전에서 독자들과의 만남에 초대를 받았다.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가 일본에서 출간되었을 때는 코로나 기간이라 줌으로만 독자들을 만났기 때문에 이번이 내게는 해외 독자들과 직접 만나는 첫 자리였다. 다른 소설도 아닌 『어제는 봄』으로 가장 먼 거리의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내게는 내내 이상하고 신기한 느낌을 불러왔다. 『어제는 봄』은 내가 쓴 어떤 소설보다도 사소하고 내밀한 순간에서 시작한 소설이었고 아무런 계획 없이 쓰고 싶다는 충동 하나로 써나간 소설이었다. 무명 소설가이자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엄마인 주인공 정수진에 이입하는 독자 못지않게 정수진을 비난하는 독자들이 있었던 덕분에 욕먹을 만한 여성 인물을 쓴다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소설이기도 했다.

앙카라 도서전서 만난 독자들
그들 곁에 있을 나의 책과 문장
소설 쓰는 첫마음 돌아보게 해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무엇보다 그 소설 안엔 앞이 보이지 않는 일에 매달리느라 스스로를 소진시켜가는 어느 시기의 내가 있었고 ‘까맣고 예쁜 내 딸’의 아홉 살 무렵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대담 진행을 맡은 번역가가 작품의 배경과 설정에 영감을 받은 데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이 소설의 영감의 원천은 제 자신입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소설.

그래서인지 행사장 안에 히잡을 쓰고 유아차를 민 여성 독자와 초로의 남성 독자와 어린이 독자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맨 앞줄에 와 앉는 이십대 독자들이 한꺼번에 보였을 때 나는 좀 더 긴장이 되었다. 주인공 정수진의 친정엄마 또래로 보이는 한 여성 독자가 더없이 호의적인 눈길을 보내왔을 때 나는 그 독자가 아직 『어제는 봄』을 읽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정수진 안에 들끓는 혐오와 갈망을 읽었다면 저렇게 호감의 눈빛으로 나를 볼 수 없을텐데. 그제야 나는 ‘『어제는 봄』을 쓴 작가’보다는 ‘한국에서 온 작가’에 좀 더 가까워져 마음 편하게 행사에 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담이 끝나고 독자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되자 나는 더는 ‘『어제는 봄』을 쓴 작가’의 입장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한 독자가 물었다. 작품을 발표해온 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글을 쓸 때 소설 속 정수진과 같은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끼느냐고. 글쓰기가 구원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처럼 나는 그 질문에 적절한 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것 같은 답을 들려준 이는 따로 있었다.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한 독자가 습작에 대한 여러 질문들을 쏟아내고 난 뒤 나는 독자에게 물었다. “왜 소설을 쓰려고 하는지 궁금해요.” 그러자 독자는 그 말이 진실임을 온 얼굴로 드러내며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소설을 쓰는 게 저를 행복하게 해줘서요!” 몇 년 만에 튀르키예에 와서 들은 그 말이 나는 다른 누구에게보다 정수진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것은 십 년째 완성하지 못한 소설을 쓰느라 정수진이 잊고 있었던 첫 마음일 테니까.

앙카라에서 일정이 끝난 뒤 이스탄불에 며칠을 머물렀다. 톱카프 궁 담을 끼고 고고학 박물관을 지나 귈하네 공원으로 이어지는 돌길에 정이 들어 그 길을 좋아하게 되었다. 여행객이 별로 많지 않은 고고학 박물관 안에 있다 보면 튀르키예의 어린이 단체 관람객이 한 무리씩 들어오곤 했다. 열 살이나 열한 살쯤 되었을까. 그중 한 여자아이가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인사하며 내게 다가왔다. 아마도 K-팝 팬일 아이의 한국말 인사에 반가워하자 아이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같이 셀카를 찍자고 했다. 이제는 커버린 ‘까맣고 예쁜 내 딸’의 그 시기를 조금은 그리워하면서 나는 아이와 얼굴을 맞대고 사진을 찍었다.

다시 만날 일이 없을 튀르키예 어린이의 휴대폰에 남아 있을 내 얼굴을 종종 생각한다. 앙카라와 이스탄불 거리 곳곳에 피어 있던 마로니에 꽃들도. 번역가가 한 꾸러미 안겨주었던 말린 대추야자와 오디. 수행 통역을 해준 H님과 아타튀르크 묘소 앞에서 맞았던 비. 한국문화원 분들이 들려준 튀르키예의 생활 이야기들.

그중에서도 튀르키예에서 받아온 가장 큰 선물은 도서전 행사장에 왔던 독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A4 용지 한 장이다. 독자들이 말해준 이름을 통역가가 한글 음가로 적어주면 나는 그걸 보고 책에 그대로 한글로 사인을 했다. 메르베. 이렘. 니사. 엘리프. 제이넵. 두이구. 괴누르. 파디메. 오래 전 우리 동네 카페의 동그란 테이블에서 썼던 한 문장이 베이란(튀르키예식 국밥)과 콩 수프가 끓고 있는 그들의 집 어딘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오늘도 조금은 부끄럽고 또 조금은 이상한 기쁨을 느낀다.

최은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