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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 마에스트라’.. 요즘 1인 독재하면 다 도망가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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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

배우 이영애의 최근작 ‘마에스트라’는 기대했던 음악드라마는 아니었지만, 남성중심으로 돌아가는 클래식 업계에서 고독한 여성 리더의 포스를 뿜어내는 이영애의 냉철한 카리스마 연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젠더 파괴의 시대에 아직 ‘남성적 세계’가 좀 있다. 음악에선 대표적인 게 오케스트라 지휘다. 힘자랑을 하는 일도 아닌데 아직 남성 비율이 절대적이다.

한양대 대학원 ‘지휘전공 1호’로 유명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

지난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서울시오페라단(단장 박혜진) 시즌 개막작 ‘라트라비아타·춘희’를 4일간 이끈 마에스트라는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이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 손지훈, 카디프 콩쿠르 우승자 김기훈 등 초특급 오페라가수를 비롯해 200명에 가까운 연주자들이 1900년대 경성 배경으로 옮긴 낯선 무대에서 베르디의 음악을 역량껏 펼칠 수 있게 한 것이 그의 리더십이었다. “각색된 무대가 연주자들에게 쉽진 않죠.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음악의 템포와 호흡도 다르거든요. 그래도 너무 좋은 가수들을 만나서 즐거웠어요. 사실 교향악 지휘가 훨씬 편하지만, 저는 오페라 지휘를 더 좋아하죠. 많은 분야 사람들과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성공적인 무대를 향해 가는 게 재밌잖아요.”

오페라 공연에선 흔히 오케스트라 피트 위로 솟은 지휘자의 뒤통수가 보인다. 여자경은 뒤통수 대신 열정적인 지휘봉만 보이는 작은 체구다. 한양대에서 작곡을 전공했지만 ‘지휘전공 1호’로 유명한데, 당시 대학원에 없던 지휘과 개설의 계기가 되서다. 그런데 지휘자가 되려고 지휘를 전공한 건 아니라니, 반전의 연속이다. “오페라 때문에 지휘공부를 하게 됐어요. 대학 오페라에 피아니스트로 참여했는데 성악가들 코칭하는 게 재밌더군요. 지도교수님이 오페라를 하려면 지휘를 해야 한다면서, 본인 경험을 살려 커리큘럼을 만들어주셨죠. 여자로서 승산이 있겠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저는 지휘자가 되려던 게 아니라 지휘라는 학문이 궁금했어요. 오페라 코치나 교단에 서고 싶은 생각이었죠.”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파이널 무대를 지휘하고 눈물을 흘렸던 마린 알솝이 런던 음악축제 BBC 프롬스 폐막 공연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오른 2013년 이래 세계 주요 무대에서 여성이 약진하고 있다. 성시연·김은선·장한나 등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한국 여성도 꽤 있다. 여자경도 2020년 클래식 전문지 객석이 꼽은 ‘세계의 파워 여성지휘자 16인’ 중 하나다. 하지만 그가 시작한 1990년대만 해도 성공사례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배움의 장도 좁은 시절이었어요. 빈에 유학을 간 것도 내가 잘 배워서 좋은 지휘자 육성을 하고 싶어서였죠. 그런데 학교가 아니라 연주 쪽으로만 기회가 이어지더군요. 그렇게 조금씩 알려지면서 여기까지 왔네요.(웃음)”

짧은 커트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무채색 일상복 차림의 그는 얼핏 중성적으로 보이고, 목소리 톤도 아주 낮았다. 그런데 지휘의 영역이 ‘남성적 세계’라고 인정하면서도 여성이라 특별할 건 없다고 했다. “남자였으면 좀 편하게 했을텐데 하는 생각은 가끔 해요. 출장을 가도 남자들은 짐싸서 가면 되는데 나는 아이의 일주일 먹거리를 다 준비해놓고 가야하니까요. 일하는 엄마들이 다 그럴테죠. 사실 올해 아이가 스무살이 돼서 조금 자유로워졌지, 그동안 애 밥 챙기느라고 쪽공부하면서 살았거든요. 모든 걸 다 직접 해 먹이는 편이라 해외에서 콜이 와도 못갔어요. 일 욕심도 많지만 엄마가 1순위란 생각으로 살았으니까요. 엄마가 지휘하는 거죠 뭐.(웃음)”

엄마의 그림자를 드러내니 솔직히 마에스트라의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수십명 연주자를 일사불란하게 단결시키려면 ‘마에스트라’의 이영애나 영화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처럼 강인한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한 것 아닐까 싶은데, “나는 포디움 위아래가 똑같다”고 답한다. “‘베토벤 바이러스’란 드라마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게 하면 다시는 콜을 못 받아요. 같은 동료인데 내가 지휘라는 파트를 맡은 것일 뿐,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는 게 지휘자 역할은 아니죠. 소통이 정말 중요하고, 단원들이 동조하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않아요. 단원들을 음악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게 지휘자의 카리스마죠. 지휘자 말이 맞다고 느껴야 소리를 내니까. 그러니 포디움 위에서 나 자신이 나올 수 밖에 없어요.”

최근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춘희’ 지휘

지난해부터 대전시향을 이끌고 있는 마에스트라 여자경. 10일 대전시향 40주년 특별 공연을 직접 지휘한다. [사진 대전시향]

지난해부터 대전시향을 이끌고 있는 마에스트라 여자경. 10일 대전시향 40주년 특별 공연을 직접 지휘한다. [사진 대전시향]

같은 악보라도 지휘자에 따라 다른 음악이 탄생하니, 방점은 악보 해석에 찍힌다. 해석의 기준은 “악보의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란다. “악보의 70~80프로는 누구나 생각하는 정답이 있고, 나머지 20~30프로를 지휘자 해석으로 제안하게 돼요. 작곡가가 그 시대적 배경에서 악보에 마킹한 것들이 뭘 의미하는지, 남들이 찾아내지 못하는 걸 찾아내서 그대로 실현에 옮기기를 추구하면서 거기에 약간의 내 색채를 입히는 정도죠. 그랬을 때 연주자들이 동조하게 하는 게 지휘자 역량이고요.”

지난해부터 그가 이끌고 있는 대전시향은 올해 40주년을 맞았다. 10일에는 40년 전 창단 연주를 오마주한 특별 공연으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 5번을 직접 지휘한다는데, 그의 해석은 뭐가 다를까. “차이콥스키가 교향곡 3악장에 왜 왈츠를 썼을까. 아직 요한 스트라우스가 살아있었고, 파티장에서 왈츠 추는 게 한창 유행이었기에 가져왔겠지 하고 유추를 해봐요. 후원자에게 5번 교향곡이 실패작이라고 털어놨던 만큼 전반적으로 우울한 모티브가 깔려있는데, 3악장만 유독 밝은 이유죠. 그런 걸 알고 접하느냐 아니냐는 사운드를 만들어갈 때 굉장한 차이거든요. 그런 보이지 않는 악보의 비밀에 예민하게 접근할 때 나만의 색채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죠.”

그러고보면 지휘자란 센 직업이 아니라 굉장히 섬세한 일이다. 차별화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게 다양한 오케스트라의 존재이유라서다. “예전에야 권위적으로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게 카리스마인줄 알았지만, 요즘 그렇게 하면 다 도망가지 누가 따르나요.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이 멋있긴 해도 2024년에 그렇게 하면 지휘 못해요. 물론 단체를 끌고 갈 때 민주주의를 완전히 내버려두면 하나로 가져갈 수 없고, 1%의 독재가 가미되어야 하는 건 맞아요. 그 1%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고, 그만한 책임감이 있어야 리더라 생각해요. 좋은 건 너희 덕이고 안 좋은 건 내가 책임진다. 그 마음가짐이 지휘자 자격요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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