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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와 민희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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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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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공연이라 생각하지 않고 10년은 더 할 거라 생각하며 하겠다.” 77세 나훈아가 은퇴 콘서트 투어에 임하는 자세는 나훈아다웠다. “떼밀려 그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할 수 있음에도 마이크를 내려놓는다”는 고별사에서 1966년 당대의 ‘아이돌’로 출발해 스토커 테러, 세 번의 결혼·이혼 등 개인사의 부침에도 57년간 톱스타로 군림한 자부심이 배어났다. “피아노 앞에 절대 앉지 않을 것이고, 기타도 안 만지고, 노래 안 하고, 안 해본 것 하면서 살겠다”는 말이 ‘지긋지긋하다’가 아니라 ‘그만큼 온전히 불태웠다’는 고백으로 들렸다.

2008년 나훈아의 기자회견(왼쪽)과 지난달 민희진의 회견은 파격과 화제성에선 닮았지만 추구한 결과는 달랐다. [중앙포토]

2008년 나훈아의 기자회견(왼쪽)과 지난달 민희진의 회견은 파격과 화제성에선 닮았지만 추구한 결과는 달랐다. [중앙포토]

공교롭게도 직전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 그의 이름이 소환돼 떠들썩했다. 하이브와 법정 다툼을 예고한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은 여러모로 2008년을 떠올리게 했다. 사실상 기자가 필요 없는 ‘라이브 원맨쇼’, 중계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비속어 발언 등. 무엇보다 “바지를 내려서 5분간 보여드리겠다”고 한 나훈아의 승부수처럼, 민희진의 작심발언(“맞다이로 들어와 뒤에서 ×× 떨지 말고”)은 여론의 추를 크게 움직였다. 나훈아 회견 이후 더는 ‘신체 훼손’ 진위를 따질 수 없게 됐듯 민희진 회견 이후 ‘경영권 탈취’ 뒤엔 ‘의혹’이라는 글자가 추가돼 중립지대로 넘어갔다.

그럼에도 두 회견이 남긴 것은 각자의 커리어 및 산업 현황만큼이나 상이하다.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나훈아는 각종 조련과 지원을 받았어도 무대에서 홀로 승부하고 성취하는 김연아 케이스다. 반면에 민희진은 그 자신이 박지성·손흥민이 아니라 축구팀을 조련하는 히딩크 같은 역할이다. 벤치와 협회가 운영전략과 연봉계약을 놓고 다툴 순 있어도 그라운드의 스포트라이트를 침해하는 건 제 살 깎아먹기 행위다. 대중문화든, 스포츠든 팬덤 없인 굴러갈 수 없고, 대중의 ‘관심’은 매우 제한적인 자원이기 때문이다. 하이브-어도어 충돌로 그 관심이 무대 위 스타가 아니라 K팝 엔터 산업 자체로 향해버렸다. 지분 구조, 풋옵션, ×저씨 같은 비문화적 용어들이 ‘버블검’ 뒤에 아른거린다. 이 환상의 판이 정교하게 설계된 수익사업이고, 내 지갑이 이 판에서 ‘호구’란 걸 몰랐던 건 아닌데, 입맛이 쓰다.

“가수는 꿈을 파는 사람이다. 꿈을 팔려면 꿈이 있어야 한다.” 나훈아가 당시 기자회견 말미에 뱉은 말의 방점은 ‘꿈’에 찍혔지만 오히려 핵심 단어는 ‘팔다’였다. 스타의 고단한 노동(훈련)조차 숭배의 대상이 되는 건 그가 파는 꿈이 곧 내 꿈이라는 환상 때문이다. 팬으로선 내가 사는 꿈이 방시혁의 것인지, 민희진의 것인지, 뉴진스의 것인지, 전부 합친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장 싫은 건 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나훈아는 9년간 은둔하며 꿈을 가공해 돌아왔지만, 지금 ‘민희진 사태’에선 누구도 물러서는 자가 없다. 이 악몽이 길어질수록 그들이 파는 꿈만 초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