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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대가가 그린 '인어공주' 고통…그 '추한' 안무 필요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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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면 파란 조명이 켜진 무대 위로 시인(poet)의 모습이 보인다. 이어 한 커플이 결혼식을 올리고, 이를 축하하는 하객 무리가 시인을 스쳐 지나간다. 막 결혼식을 마친 신랑은 시인이 연모하는 대상. 시인은 다른 사람 곁에서 행복해하는 신랑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바다로 떨어진 시인의 눈물은 인어공주가 된다.

발레 '인어공주'에서 시인을 연기 중인 변성완, 인어공주를 연기 중인 조연재 무용수. 사진 국립발레단

발레 '인어공주'에서 시인을 연기 중인 변성완, 인어공주를 연기 중인 조연재 무용수. 사진 국립발레단

바다는 인어공주의 세상이다. 인어공주는 깊은 바다를 유영하듯 현란한 폴 드 브라(port de bras·발레에서 팔의 움직임)를 선보인다.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움직이듯 부드러우면서도 날렵하다. 몽환적인 파란 조명이 더해져 바닷속 세계가 완성된다.

발레 '인어공주'에서 인어공주를 연기 중인 조연재 무용수. 펄럭이는 긴 바지가 인어의 꼬리를 닮았다. 사진 국립발레단

발레 '인어공주'에서 인어공주를 연기 중인 조연재 무용수. 펄럭이는 긴 바지가 인어의 꼬리를 닮았다. 사진 국립발레단

드라마 발레 거장 존 노이마이어가 안무한 발레 '인어공주'가 1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개막했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현역 무용수이던 시절 그에게 무용계 최고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 상을 안겨준 작품, '카멜리아 레이디'를 만든 것이 바로 노이마이어다. 그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발레단, 중국 국립발레단 등이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를 무대에 올렸다. 국내 발레단이 '인어공주'를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인어를 연기하는 무용수들은 길고 통이 넓은 비단 바지를 입고 춤을 춘다. 무용수가 바뜨망(battement·무릎을 편 상태로 힘차게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을 찰 때마다 바짓단이 펄럭이는데, 이 모습이 탄력 있게 튀어 오르는 인어의 꼬리를 연상케 했다. 인어공주가 깊은 바다를 헤엄치는 장면에서는 남자 무용수 셋이 달라붙어 인어 공주를 들어 올렸다. 개막일 인어공주로 분한 국립발레단 조연재는 허공에 들어 올려진 상태에서도 흔들림 없는 연기와 폴 드 브라를 선보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토록 원하던 다리를 얻었지만 인어공주는 인간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돈다. 어렵게 인간이 돼 신을 수 있게 된 포인트 슈즈는 고통을 더하고, 화려한 드레스는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사진 국립발레단

그토록 원하던 다리를 얻었지만 인어공주는 인간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돈다. 어렵게 인간이 돼 신을 수 있게 된 포인트 슈즈는 고통을 더하고, 화려한 드레스는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사진 국립발레단

인어공주가 꼬리를 떼고 인간의 다리를 얻는 장면이 극의 절정이다. 1막의 후반부에서 인어공주는 바다마녀를 찾아가 다리를 갖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바다마녀가 인어의 꼬리를 '벗겨내는' 과정은 고통스럽게 묘사된다. 꼬리를 떼어낸 인어는 몸부림치면서 온몸을 비틀고, 땅을 구른다. 존 노이마이어는 이를 두고 "추한 움직임"이라는 표현을 썼다. 고통과 슬픔도 아름답게 표현하는 클래식 발레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발레 '인어공주'를 만든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가 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발레 '인어공주'를 만든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가 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이마이어는 왜 '추한' 안무를 만들었을까? 먼저 클래식 발레와 드라마 발레의 차이를 살펴봐야 한다. 클래식 발레는 주로 왕자와 공주가 사랑하는 이야기인데, 중간중간 뜬금없는 캐릭터들이 나와 차례로 춤을 춘다. 이걸 디베르스티망(divertissement)이라고 부른다. 오로지 '춤을 보는 재미'를 위해 이야기를 끊고 디베르스티망을 선보이는 클래식 발레와 달리, 드라마 발레는 모든 안무, 모든 마임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드라마 발레에서 춤은 곧 감정이기 때문이다.

꼬리를 뗀 인어공주가 풀업(상체를 꼿꼿하게 세우면서 끌어올리는 포지션)을 완벽하게 지킨 채 슬픈 표정을 짓는다면, 관객이 그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 움직임이 아름답다고 느낄지언정, 고통이 생생히 전달되지는 않을 터다. 노이마이어의 '추한' 안무는 자신의 세계를, 몸의 일부를 포기하면서까지 사랑을 좇았던 순수한 영혼의 아픔을 날 것 그대로 비춘다. 인어공주가 꼬리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별이 되어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을 훔치는 관객이 적지 않았다.

작은 방에 갇힌 인어공주. 인간의 다리를 얻었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해 불행한 그의 마음을 작은 방에 갇힌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사진 국립발레단

작은 방에 갇힌 인어공주. 인간의 다리를 얻었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해 불행한 그의 마음을 작은 방에 갇힌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사진 국립발레단

스토리에 기승전결이 있고 주인공과 조연이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에서는 클래식 발레의 문법을 썼지만,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안무와 전자 악기를 활용한 음악은 모던 발레에 가까웠다. 작곡가 레라 아우어바흐는 신비로운 생명체인 인어공주의 목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전자악기 '테레민'을 선택했고 테레민과 현악기의 불협화음을 통해 인어공주의 불안한 심리를 표현했다. 차이코프스키나 아돌프 아당의 발레 음악을 좋아한다면 아우어바흐의 음악이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군무의 합이 좋지 않았다는 평도 있다. 공연은 5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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