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현실 문제 살펴 실생활에 도움 되는 학문, ‘실학’을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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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중기·수레 만들고 세금제도 개혁하고
실용적 학문 ‘실학’, 현대에도 통한다  

과학·경제·역사 등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학문입니다. 사회가 어지러울 때,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새로운 학문이 나타나게 되는데요. 조선시대 후기에는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실학’(實學)이 많은 학자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죠. 실학은 어떻게 백성들을 도왔을까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실학박물관과 다산정약용유적지에서 실학의 전개·형성 과정과 여러 실학자들의 업적을 알아봤습니다.

이준호 학생기자·손지우 학생모델·김이솔(왼쪽부터) 학생기자가 실학박물관·다산정약용유적지에서 조선시대 후기 백성에 도움이 된 학문 ‘실학’에 대해 알아봤다. 다산정약용유적지에 있는 정약용 생가 ‘여유당’에서 정약용의 일생을 돌아본 소중 학생기자단.

이준호 학생기자·손지우 학생모델·김이솔(왼쪽부터) 학생기자가 실학박물관·다산정약용유적지에서 조선시대 후기 백성에 도움이 된 학문 ‘실학’에 대해 알아봤다. 다산정약용유적지에 있는 정약용 생가 ‘여유당’에서 정약용의 일생을 돌아본 소중 학생기자단.

실학은 17세기 중반~19세기 초반 조선시대 후기에 새롭게 등장한 사회 개혁 사상이에요. 당시 조선은 나라 안팎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요. 밖의 상황을 살펴보면, 16세기부터 서양에서는 여러 나라가 해상 활동을 활발히 하며 전 세계를 탐험하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17세기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됐죠. 이러한 세계 변화에 조선은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임진왜란(1592~1598)·병자호란(1636~1637) 등 큰 전쟁을 두 차례나 겪으며 정치는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은 궁핍해졌죠. 이러한 국내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타난 것이 바로 ‘실학’입니다.

김이솔 학생기자·손지우 학생모델·이준호 학생기자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실학박물관을 방문했어요. 김현진 학예연구사가 “실학의 뜻을 알고 있나요?”라고 묻자 지우 학생모델이 손을 들고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이요”라고 말했어요. “맞아요, 실학(實學)은 말 그대로 ‘실제로 도움이 되는 학문’이란 뜻으로 지식·정보성, 개혁성, 개방성의 특징이 있어요. 생활에 필요한 지식·정보를 책이나 도구로 만들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할 수 있게 제도를 개혁하며, 다른 사상을 배척하던 당시 흐름에 맞서 다른 사상이라도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였죠. 실학을 연구한 실학자들은 중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온 서양의 과학문물과 학문을 적극 받아들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풍요롭게 하며, 나라를 부유하고 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죠. 중국 중심, 성리학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우리 역사·언어·제도·지리 등을 연구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실학을 대표하는 물건인 ‘수레’를 설명하고 있는 김현진(뒷줄) 학예연구사. 수레는 무거운 짐을 멀리까지 빨리 나를 수 있게 해 농업의 생산력 향상과 상업 발전에 기여했다.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실학을 대표하는 물건인 ‘수레’를 설명하고 있는 김현진(뒷줄) 학예연구사. 수레는 무거운 짐을 멀리까지 빨리 나를 수 있게 해 농업의 생산력 향상과 상업 발전에 기여했다.

이솔 학생기자가 “실학은 성리학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라고 질문했어요. “유학은 공자의 사상·가르침을 근본으로 삼는 학문이에요. 성리학은 유학의 한 형태로, 중국 송·명나라 때 형성됐죠. 인간의 마음과 사회관계, 사물의 근본 이치, 우주의 원리 등을 탐구해요. 고려 말기에 들어온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와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학문이 되면서 크게 발전했어요. 그러나 성리학은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았죠. 지나치게 추상적인 논의만 하는 성리학을 비판하며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학문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면서 실학이 나타나게 된 것이에요. 실학은 성리학과 마찬가지로 유학에 속하지만, 실용적·실천적이며 백성을 위한 학문이라는 면에서 성리학과 다르죠.”

김 학예연구사가 전시실 입구에 전시된 수레를 소개했어요. “수레는 실학을 대표하는 물건이에요. 지금은 자동차·비행기·배·기차 등 다양한 운송수단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운송수단이 한정돼 있었어요. 실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에서는 많이 사용하는 수레를 우리는 잘 사용하지 않았죠. 실학자들은 수레가 무거운 짐을 멀리까지 빠르게 나를 수 있으니 백성들의 주 생업인 농업의 생산력 향상과 상업 발전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어요. 수레를 사용하려면 수레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내야 했는데요. 길이 생기면서 수레는 물론 사람들도 이동하기 편해졌어요.”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지식·정보를 한데 모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실학박물관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지식·정보를 한데 모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실학박물관

실학의 형성 과정과 특징

소중 학생기자단은 먼저 실학을 처음으로 연구한 학자라 ‘실학의 비조(鼻祖·어떤 학문이나 기술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라고 불리는 유형원(1622~1673)을 만났습니다. “유형원은 어린 시절 병자호란을 겪고 여러 사회 문제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를 바로잡고자 조선 후기 국가 개혁안 『반계수록』(1670)을 썼어요. 총 26권으로 토지 제도, 상공업, 교육, 군사, 관직 등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방안을 담았죠. 『반계수록』과 그의 실학사상은 후대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줬어요.”

준호 학생기자가 “실학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업적은 무엇인지” 궁금해했죠. “실학이 탄생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유형원은 물론, 이수광·김육 등이 대표적이에요. 이수광(1563~1629)은 실학의 선구자라고 불리는데요. 그가 쓴 『지봉유설』(1614)은 17세기 대표 ‘유서’(類書)예요. 유서는 지식·정보를 한데 모은 일종의 백과사전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식·정보를 찾을 때 주로 인터넷이 연결된 휴대전화나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이때만 해도 사람들의 말을 직접 듣거나 책을 봐야 했어요. 책도 흔한 물건이 아니다 보니 원하는 책이 없으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소문을 해야 했죠. 그만큼 지식·정보를 얻는 게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이수광은 세 차례 사신으로 중국 북경(베이징)에 다녀오며 국제적 감각을 갖췄고 사상적으로도 개방적이었어요. 동남아·유럽 등 전 세계 50여 개국의 지리·풍속·역사·문물 등의 방대한 정보를 소개하는 『지봉유설』은 인용된 서적만 348종이며 항목은 3435개에 이르죠.”

‘경세치용’을 대표하는 실학자 이익(왼쪽 사진)과 ‘이용후생’을 대표하는 실학자 박지원. 실학박물관

‘경세치용’을 대표하는 실학자 이익(왼쪽 사진)과 ‘이용후생’을 대표하는 실학자 박지원. 실학박물관

김육은 17세기 중반, 백성의 부담을 덜고 국가 재정을 늘리기 위해 제도를 개혁해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자고 주장했어요. “조선의 세금 제도는 크게 전세(토지), 공물(지역 특산물), 군역·요역(노동)의 3가지가 있는데, 그중 특산물을 바치는 공물을 거두는 제도가 백성들을 가장 힘들게 했어요. 자연재해나 상황에 따라 작물이 나지 않아도 바쳐야 했기 때문에 각종 폐단이 발생한 거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물을 쌀로 통일하고, 쌀이 귀한 지역은 베·면화와 같은 옷감이나 화폐로 내게 한 것이 ‘대동법’이죠. 소유한 땅만큼 차등으로 내게 해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소작농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등 백성의 부담은 줄고, 나라의 수입은 늘어나는 합리적인 세법이었어요. 또한 현재 우리가 쓰는 100원이나 500원짜리 동전과 같은 ‘상평통보’의 사용을 주장했는데, 상평통보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화폐로, 전국으로 퍼져 상업 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쳤어요.”

“학생기자단 여러분은 외국에 간다면 어디 가고 싶어요?” 김 학예연구사가 묻자 준호 학생기자는 “스페인에서 레알 마드리드 경기를 보고 싶다”고 했고, 지우 학생모델은 “미국 뉴욕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실학자들이 가고 싶었던 곳은 조선에 없는 다양한 문물·기술 등이 모이던 중국 북경입니다. 당시 북경을 연경(燕京)이라고 불러, 사신으로 연경에 간 이들을 ‘연행사’라고 했는데요. 연행사는 연경에서 새로 접한 문물·기술의 이야기를 담아 견문기를 쓰기도 하고, 서양 사람들을 만나 사신도를 그리기도 했어요.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1780)가 대표적이죠. 박지원이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만수절(칠순잔치) 축하 사절로 연경에 있는 건륭제의 여름 별장인 ‘열하’(熱河)에 갔을 때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로 벽돌 사용, 교통제도, 지전설(地轉說)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겼죠. 실학자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면서 학문을 발전시키려고 했어요.”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화폐 ‘상평통보’는 전국적으로 사용돼 소비를 촉진하며 상업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화폐 ‘상평통보’는 전국적으로 사용돼 소비를 촉진하며 상업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솔 학생기자가 “실학은 조선시대 언제 인기가 많았나요?”라고 물었어요. “정조가 재위한 1776~1800년, 실학을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개혁 정치를 펼쳤어요. 당시 선진 기술을 활용해 수원화성을 세우고, 정약용·박제가·유득공 등 실학자들을 대거 등용했죠.” 준호 학생기자는 “실학을 받아들이려고 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라고 질문했어요. “조선은 오랫동안 성리학을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됐어요.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의 기득권인 양반은 현실과 동떨어진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궁핍한 생활로 고통받는 백성에 공감하지 못했죠. 중국을 통해 서양에서 새롭게 들어온 문물에 관심을 가지며 생각을 바꾸고, 현실적인 문제를 개혁하려는 ‘앞서 나가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세상을 바꾸려는 여러 실학자가 등장하고 권력을 가진 왕(정조)이 실학자들을 등용하면서 실학은 백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어요.”

정약용(왼쪽 사진)과 홍대용 초상화(복제품). 정약용은 거중기·녹로 등을 만들어 수원화성 축조 기간을 단축했으며, 홍대용은 인간 중심적·사대주의적·지구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학박물관

정약용(왼쪽 사진)과 홍대용 초상화(복제품). 정약용은 거중기·녹로 등을 만들어 수원화성 축조 기간을 단축했으며, 홍대용은 인간 중심적·사대주의적·지구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학박물관

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로 본 실학

실학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저마다 처지와 문제의식이 조금씩 달랐어요. 오늘날 실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당시 실학자들의 성격을 크게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로 구분합니다. “‘경세치용’은 학문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백성의 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토지 문제, 농업 기술, 신분·세금·과거제도 등 국가의 현실 문제를 주로 다뤘고 농업을 중시해 ‘중농학파’라고도 해요.” 김 학예연구사가 ‘경세치용’을 대표하는 실학자인 이익(1681~1763)의 저서 『곽우록』을 소개했죠. “‘곽’(藿)은 콩잎, ‘우’(憂)는 걱정을 말해요. 이익은 자신을 ‘콩잎 먹는 사람’, 즉 가난한 사람이라고 지칭했죠. 가난한 사람의 걱정을 담은 『곽우록』은 학교·과거·인재 양성 등 조선 사회가 당면했던 여러 문제를 19개 항목으로 제시하죠. 『성호사설』은 이익이 평생 공부하면서 느낀 점과 연구한 생각을 총 30책 3007편의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에요. ‘지구는 둥글고 달보다 크고 해보다 작다’ ‘서양의 기술은 매우 정교하다’ ‘단군 기자 조선이 요서 지방에까지 미쳤다’ ‘하층민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담겼죠.”

정약용(1762~1836)은 18세기에 활약한 이익과 살았던 시대가 달라 그에게 직접 배우진 않았지만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랐어요.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표현되는 인물이에요.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왕명에 따라 수원화성 축조(1793~1796)에 앞장섰고, 거중기·녹로 등을 만들어 10년으로 예상됐던 공사 기간을 2년 8개월로 줄였어요. 또한 경기암행어사(1794)도 수행하고 황해도 곡산 도호부사(1797~1799)로 목민관 생활도 했죠. 이때 느낀 점과 목민관이 갖춰야 할 행실 등 지침을 담아 『목민심서』(1818)를 썼어요. 목민관은 지금의 지방자치단체장인데,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하는 목민관들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일이 많아 지침서를 만든 겁니다.”

박제가가 쓴 『북학의』(위 사진)는 경제가 발전하려면 소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익의 저서 『곽우록』은 학교·과거·인재 양성 등 조선 사회가 당면했던 여러 문제를 19개 항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박제가가 쓴 『북학의』(위 사진)는 경제가 발전하려면 소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익의 저서 『곽우록』은 학교·과거·인재 양성 등 조선 사회가 당면했던 여러 문제를 19개 항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용후생’은 이롭게 사용돼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는 뜻이에요. 생산 수단과 문물제도 등에 관심을 가지고,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앞선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상공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죠. 이들을 ‘중상학파’ 또는 청나라의 학문과 문물을 뜻하는 ‘북학’(北學)의 수용을 주장했다고 해서 ‘북학파’라고도 해요. “조선시대 많은 양반은 절약을 통해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용후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제가·박지원·홍대용 등의 실학자들은 재물을 많이 써야 생산이 늘고 기술도 발전하며, 경제가 살아나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박제가(1750~1805)는 청나라에서 풍속과 제도를 살펴보고 쓴 기행문인 『북학의』(1778)에서 ‘재물은 대체로 샘과 같은 것이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버린다’라고 소비를 강조했죠. 소비를 하면 경제가 활발해진다는 게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어요.”

음악·수학·천문에 조예가 깊은 홍대용(1731~1783)은 특히 실학총론이라고 할 만한 『의산문답』(1766)에서 ‘인물균’(人物均)·‘화이일’(華夷一)·‘우주무한’ 이론을 설파했죠. “‘인물균’은 사람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사람과 동식물 등 세상 만물이 동등한 존재라는 것, ‘화이일’은 중국(명나라)과 오랑캐(청나라)를 구분 짓지 않는 것이에요. 조선은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을 오랑캐라고 했어요. 홍대용은 사대관계였던 명나라와의 의리 때문에 청나라를 배척하지 말고 그 선진문물을 배우고 가져와야 한다고 했죠. ‘우주무한’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기존의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 이론을 거부하고 땅이 둥글고 회전하며, 우주는 무한한 영역이라는 것이라고 했죠. 이를 통해 인간 중심적·사대주의적·지구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해·달·오행성(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 등의 위치를 관측하는 천문기기 ‘혼천의’.

해·달·오행성(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 등의 위치를 관측하는 천문기기 ‘혼천의’.

왼쪽 사진부터 서유구가 쓴 생활과학서 『임원경제지』(복제품), 여성 실학자 이사주당이 지은 세계 최초 태교 관련 전문서 『태교신기』, 발해를 우리 역사로 기록한 유득공의 『발해고』(복제품). 실학박물관

왼쪽 사진부터 서유구가 쓴 생활과학서 『임원경제지』(복제품), 여성 실학자 이사주당이 지은 세계 최초 태교 관련 전문서 『태교신기』, 발해를 우리 역사로 기록한 유득공의 『발해고』(복제품). 실학박물관

‘실사구시’는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뜻해요. 사료 등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이를 통한 고증으로 연구하는 걸 중요하게 여겼죠. “조선시대 사람들은 세상의 중심이 중국(명나라)이며, 조선은 변방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청나라가 세워지고, 청나라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세상은 넓고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며 우리의 것을 탐구하기 시작했죠. 대표적인 실학자 김정희(1786~1856)는 1816년 아무도 정체를 몰랐던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신라 진흥왕 16년(555)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냈어요.”

김정호(1804~1866?)는 자연 지형과 교통로 등 다양한 정보를 담은 전국 지도인 ‘대동여지도’(1861)를 제작했죠. 목판으로 간행된 대동여지도는 22층으로 나눈 첩 형식으로 휴대가 간편하고 누구나 우리나라 전체를 보기 쉽게 만들었으며 정확성이 매우 높아요. 서유구(1764~1845)는 1806년부터 30년 동안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 생물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집대성한 생활과학서 『임원경제지』를 지었어요. 특히 가축 키우는 방법, 밭을 가는 방법 등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내용을 담아 농업이 주 생업인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됐죠. 여성 실학자 이사주당(1739~1821)이 지은 『태교신기』(1800)는 세계 최초의 태교 관련 전문서예요. 태교의 정의와 효과, 중요성 등의 내용을 담아 임신한 여성들이 아이를 잘 낳을 수 있게 했죠. 과거 일본에서 여자 중·고등학교 교과서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해요.

특정 별의 위치와 과거·현재·미래 시간을 계산할 수 있는 ‘혼개통헌의'(왼쪽 사진)와 동양의 별자리를 서양의 작도법으로 제작한 육면체 그림 ‘방성도'(복제품). 실학박물관

특정 별의 위치와 과거·현재·미래 시간을 계산할 수 있는 ‘혼개통헌의'(왼쪽 사진)와 동양의 별자리를 서양의 작도법으로 제작한 육면체 그림 ‘방성도'(복제품). 실학박물관

“유득공(1748~1807)은 『발해고』(1784)를 지어 조선의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발해를 우리 역사로 기록했어요. 만주를 포함한 북방 일대의 영토도 우리 역사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죠. 중국은 2002년부터 중국 국경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동북쪽 지역의 역사 연구 프로젝트, 즉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실시했어요. 『발해고』가 중요한 건 동북공정에 맞서 발해가 우리나라 역사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지우 학생모델이 “실학 관련 물건들에는 어떤 게 있나요?”라고 물었어요. 서양의 과학 지식이 조선에 전래되면서 특히 천문학·지리학이 크게 발전하며 조선 사람들이 가졌던 시공간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천문과 지리, 시공간을 철학적인 의미로 이해했는데, 그게 자연현상이며 실제 측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됐죠. “유금(1741~1788)이 만든 ‘혼개통헌의’(1787)는 고대·중세 이슬람과 유럽에서 시간 측정·점성술·항해·측량 등에 썼던 휴대용 천문기구인 ‘아스트롤라베’(astrolabe)로, 18세기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아스트롤라베로는 유일해요. 혼개통헌의는 양면의 원반과 구멍 뚫린 판인 ‘레테’(Rete)로 구성됐고, 레테가 붙어있는 원반 앞면에는 자오선·지평선·적도선 등을 새겨 특정 별의 위치와 과거·현재·미래 시간을 계산할 수 있어요. 원반 뒷면으로는 시간을 관측하는 도구인 막대 모양의 ‘조준의’를 통해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며, 원반 테두리에는 눈금이 새겨져 있어 24절기와 일출·일몰 시각을 알아낼 수 있죠.”

김이솔 학생기자가 보고 있는 ‘혼상’은 둥근 구면에 좌표를 그려 하늘의 별과 별자리를 해당되는 위치에 표기한 천문의기다.

김이솔 학생기자가 보고 있는 ‘혼상’은 둥근 구면에 좌표를 그려 하늘의 별과 별자리를 해당되는 위치에 표기한 천문의기다.

송이영(?~?)은 1669년 천체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와 톱니바퀴 원리를 이용한 서양식 자명종 시계를 결합해 ‘혼천시계’를 만들었어요. 왼쪽에 혼천의, 오른쪽에는 추의 무게로 움직이는 시계로 구성하고 톱니바퀴로 연결해 함께 움직이죠. 시간에 따라 혼천의에 달린 태양 모형이 황도(태양의 둘레를 도는 지구의 궤도가 천구에 투영된 궤도)를 회전하면서 태양의 위치와 달의 모양을 동시에 알려줘요. 과거 동양에서는 현재 있는 곳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의 별자리만 그렸는데, 서양 천문학이 들어오면서 망원경으로 관측할 수 있는 별들과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지구 반대편의 별에 대해서도 알게 됐죠. 서창재(1726~1781)가 만든 ‘방성도’(1764)는 동양의 별자리를 서양의 작도법으로 제작한 휴대용 육면체 별자리 그림이에요. 사람이 한 번에 볼 수 있는 90도 범위를 기준으로, 하늘을 위아래와 옆면 6면으로 나눠 별이 떠 있는 하늘 전체를 그리고자 했어요.

정약용 생가 여유당과 묘가 있는 다산정약용유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선정한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관광명소 ‘남양주 8경(景)’ 중 1경이다.

정약용 생가 여유당과 묘가 있는 다산정약용유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선정한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관광명소 ‘남양주 8경(景)’ 중 1경이다.

다산정약용유적지에서 만난 실학자 정약용

실학박물관을 나온 소중 학생기자단은 바로 옆 다산정약용유적지로 향했어요. 실학박물관과 다산정약용유적지가 위치한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은 정약용의 5대 선조부터 살던 곳으로, 정약용도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그의 생가와 묘가 남아있죠. 이솔 학생기자가 다산정약용유적지 입구 앞에 있는 거중기 모형을 보고 “거중기가 생각보다 정말 커요”라고 말했어요. “정약용이 수원화성 축조에 사용한 거중기는 예수회 선교사 테렌츠 슈레크가 서양기계 지식에 대해 중국어로 소개한 백과사전인 『기기도설』(1627)을 참고해 고안한 것이에요. 여러 도르래를 이용해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릴 수 있게 했죠. 또 석재·목재 등의 짐을 싣고 경사를 올라가기 편하도록 바퀴를 튼튼하게 만든 수레 ‘유형거’, 11m의 높이로 무거운 물건을 높이 올리는 크레인 ‘녹로’ 등도 만들어 10년으로 예상됐던 축조 기간을 2년 8개월로 단축하고, 경비를 절약하는 성과를 올렸죠.”

다산정약용유적지로 들어가자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與猶堂)이 눈에 들어왔어요. “정약용은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자 정치적 반대파들의 음해를 피해 39세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집을 ‘여유당’이라 부르며 학문 연구에 몰두했어요. 정약용의 호이기도 한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기원전 4세기)에 있는 ‘머뭇거리기는 마치 겨울 강을 건너듯, 두리번거리기는 마치 네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조심하고 경계하며 남의 비방을 자초하지 않고 살겠다는 다짐을 담았죠. 그러나 다음 해 천주교 문제와 정치적 반대파 때문에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현재 포항시)과 전라도 강진으로 18년 동안 유배를 갑니다.” 정약용은 관직·유배 등으로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지만, 유배 생활이 끝나고 돌아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죠. 본래 정약용이 살던 여유당은 1925년 대홍수로 떠내려갔고, 현재의 여유당은 남아있는 사진을 토대로 1986년에 복원한 겁니다.

정약용이 후대가 자신의 업적을 잘못 해석할 것을 염려해 직접 쓴 ‘자찬묘지명’. 묘지명 뒤편 언덕에 정약용의 묘가 있다.

정약용이 후대가 자신의 업적을 잘못 해석할 것을 염려해 직접 쓴 ‘자찬묘지명’. 묘지명 뒤편 언덕에 정약용의 묘가 있다.

“정약용의 호를 ‘다산’(茶山)으로 많이 알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다산을 쓰지 않았어요.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기거했던 곳 주위에 차(茶)가 많이 자라고, 그의 학문적 업적이 대부분 그곳에서 이뤄져 제자들이 ‘다산’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정약용은 ‘여유당’ 외에도 관직에 나아가 서울에 머물며 고향을 그리워해 생가 서쪽 산의 이름을 딴 ‘철마산인’(鐵馬山人), 강진 유배에서 돌아와 환갑 전까지 한강의 다른 이름인 ‘열수’(冽水) 등을 호로 사용했어요.”

여유당 왼편에는 정약용의 묘지명이 있습니다. “정약용이 직접 쓴 것으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라고 해요.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이곳에 돌아와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며 노년을 보냈어요. 1822년 환갑을 맞아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정리하며, 후대가 자신의 업적을 잘못 해석할 수 있을 것을 염려해 남을 시키지 않고 스스로 묘지명을 지었죠. 자찬묘지명의 첫 줄은 ‘이 무덤은 열수 정약용의 묘이다’라고 시작해요.” 묘지명을 지나 바로 옆 계단을 타고 언덕을 올라가면 정약용의 묘가 있습니다. “1836년 정약용은 부인 홍혜완과의 회혼례(결혼 60주년 기념 혼례) 당일 아침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했어요. 한강이 보이는 뒷산에 묻어달라는 생전의 바람대로 여유당 생가 뒤편 언덕 묘소에 잠들었죠. 부인 홍혜완은 1838년 사망해 정약용 곁에 묻혔어요.”

다산정약용유적지 입구 앞에 있는 정약용 발명품 중 하나인 거중기 모형을 살펴 본 소중 학생기자단.

다산정약용유적지 입구 앞에 있는 정약용 발명품 중 하나인 거중기 모형을 살펴 본 소중 학생기자단.

정약용 생가 여유당과 묘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지우 학생모델이 “실학이 앞으로의 우리 삶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어요. “실학은 현실 문제를 살피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적인 방안과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잖아요. 과거 조선시대에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현대 실학자가 될 수 있어요. 지금 우리 생활의 문제와 어려움을 생각해 보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거예요. 조선시대에 비해 현대는 공간의 제약이 없고, 기술도 발전해 훨씬 생활이 복잡하고 다양해졌어요. 그만큼 실생활의 문제도 많아요. 실학 정신을 따라 현실 문제를 마주한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정약용의 대표 작품 6

정약용은 대표작 ‘1표 2서’를 비롯해 약 500권의 책과 작품을 남겼습니다. 1표는 『경세유표』, 2서는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말해요. 김현진 학예연구사가 ‘1표 2서’와 함께 정약용을 대표하는 작품 6개를 소개했습니다.

실학박물관

실학박물관

『경세유표』(1817)
현행법의 개혁을 전제로 국가 체제의 혁신 방안을 제시한 책. 정약용은 중국 주나라의 문물제도를 모델로 삼고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신분과 지역 차별을 배제한 인재등용, 관직 체계 개편, 토지제도 개혁 등을 통해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어요.

실학박물관

실학박물관

『목민심서』(1818)
현재의 지방자치단체장인 목민관이 지켜야 할 행정지침서로 목민관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경계할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어요. 또한 목민관이 처음 부임하면서부터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해야 할 주요 업무를 잘 정리했죠.

실학박물관

실학박물관

『명청록』(1819)
목민관이 살인사건 등을 처리할 때 참고용으로 지은 형법에 관한 『흠흠신서』(1822)의 초기 편집본이에요. 백성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지 않도록 조사·심리·처형 과정 참고 선례를 요약하고, 모범 판례와 자신이 목민관이었을 당시 사건을 예로 들었어요. 한국 법제사상 최초의 율학 연구서로 평가받아요.

실학박물관(복제품)

실학박물관(복제품)

『하피첩』(1810)
‘하피첩’은 ‘노을빛 치마로 만든 첩’이라는 의미로, 1810년 부인 홍혜완이 유배 간 정약용을 그리워하며 치마를 보내자 정약용이 이를 재단해 만든 첩에 두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지침과 가치관을 담아 보낸 겁니다. 가족의 유대, 선비에게 필요한 마음가짐, 삶을 넉넉하게 하고 가난을 구제하는 방법 등의 내용이 담겼죠.

실학박물관(복제품)

실학박물관(복제품)

‘매화병제도‘(1813)
어릴 때 헤어진 막내딸이 1813년 결혼을 하게 되자 『하피첩』을 만들고 남은 천에 결혼을 축복하고 잘 살라는 마음을 담아 시를 쓰고 매화와 새를 그렸어요. 두 마리 새처럼 다복하게 화목한 가정을 꾸미고, 풍성한 매화나무와 같이 집안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죠.

『여유당전서』(1934~1938)
1934~1938년 조선학 운동과 정약용 서거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역사학자 정인보·안재홍 등이 교열에 참여해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발행한 책. 정약용의 저서를 한데 모아 154권 76책의 전집 형태로 묶었죠. 시·문장·사서·경서·관혼상제·정치·법률·음악·지리·의학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어요.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정약용과 조선시대 실학에 대해 책을 읽으며 취재 준비를 했어요. 실학박물관에 가니 책에서 읽었던 내용보다 더 실학이 조선시대 실생활에 도움을 줬고 얼마나 유용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죠. 특히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로 수원화성을 2년 만에 지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그 시대 기술의 놀라움을 엿볼 수 있었죠. 우리 조상님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열정과 노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저도 실학자들처럼 세상에 실제로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김이솔(서울 대곡초 5) 학생기자

실학박물관과 다산정약용유적지를 방문했습니다. 작년에 학교 현장학습으로 실학박물관을 견학했지만 이번 취재를 통해 실학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게 됐어요. 실학이란 조선 후기의 개혁적·실천적 학풍을 가리켜요. 실학의 대표 학자들은 정약용·박지원·김정희 등이 있죠. 실학박물관에서 실학자들을 알아가면서 실학이 어떤 학문인지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소중 친구들도 이번 기사를 통해 실학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손지우(경기도 모당초 5) 학생모델

첫 취재라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실학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김현진 학예연구사님이 실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셨어요. 조선시대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편안함과 이익만 추구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지 않았어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나면서 백성들은 더욱 힘들어졌죠. 실학은 이러한 시대에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 나타났어요. 특히 정약용은 거중기와 녹로를 사용해 10년 걸릴 수원화성 축조를 2년 8개월 정도로 단축했어요. 이번 취재를 통해 실학에 대해 좀 더 알게 됐고, 실학은 정말 중요하고 고마운 학문이라고 느꼈습니다.

이준호(경기도 홈스쿨링 중1)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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