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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롱'의 신분상승...다시 돌아온 엄마 가방 '잇 백' 등극 [비크닉]

중앙일보

입력

b.트렌드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도 반복되면 의미가 생깁니다. 일시적 유행에서 지속하는 트렌드가 되는 과정이죠. 트렌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를 반영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모호함을 밝히는 한줄기 단서가 되기도 하고요.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트렌드를 건져 올립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에서는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서 유의미한 ‘통찰(인사이트)’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때 누구나 ‘그 가방’이라면 안다는 ‘잇 백(it bag)’이 존재했다. 하지만 대세를 따르기보다 개성과 취향을 중시되면서 점차 잇백이라는 말 자체도 사라져갔다. 그런데 지난해, 이런 잇백의 지위를 다시 획득한 가방들이 나타났다.

과거와 달라진 건 명품도, 묵직한 가죽도 아닌 나일론 가방이라는 점이다. 가볍고 실용적인 소재로 간결한 디자인과 수납력, 무엇보다 합리적인 가격을 특징으로 한다.

최근 가볍고 수납력이 좋은 실용적인 나일론 소재 가방이 연달아 '잇백'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사진 유니클로

최근 가볍고 수납력이 좋은 실용적인 나일론 소재 가방이 연달아 '잇백'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사진 유니클로

다시 돌아온 엄마 가방

최근 나일론의 귀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건 롱샴의 ‘르 플리아쥬(Le Pliage) 백’이다. 색색의 나일론 소재에 톱 핸들 스타일의 가죽 손잡이, 접으면 납작한 사각형이 되는 실용적 디자인이 특징으로, 지난 2010년대 초 선풍적 인기를 끈 모델이다. 잠시 기억에서 잊힌 이 백이 요즘 다시 길거리에 출몰하고 있다.

지난해 배우 정려원, 가수 강민경 등 국내 패셔니스타들이 다시 롱샴의 가방을 들어 화제가 됐다. 사진 정려원 인스타그램

지난해 배우 정려원, 가수 강민경 등 국내 패셔니스타들이 다시 롱샴의 가방을 들어 화제가 됐다. 사진 정려원 인스타그램

패션 검색 엔진인 리스트 인덱스(Lyst Index)에 따르면 롱샴이 트렌드 레이더망에 등장한 것이 지난해 2분기다. 당시 르 플라아쥬는 2023년 2분기 ‘가장 인기 있는 패션 아이템’ 9위에 랭크됐다. 주목할 점은 롱샴을 주목한 이들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사실. 기존 고객인 밀레니얼 세대가 아니라 Z세대다. 이들은 기존 베스트셀러였던 미디움 사이즈 대신 손바닥만 한 미니 파우치에 열광한다.

틱톡에서 '롱샴르플리아쥬' 해시태그(#)로 검색하면 관련 영상이 수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 틱톡 화면 캡처

틱톡에서 '롱샴르플리아쥬' 해시태그(#)로 검색하면 관련 영상이 수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 틱톡 화면 캡처

이 유행의 중심에는 틱톡 등 디지털 매체가 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다르면 해시태그(#) 롱샴르플리아쥬(Longchamplepliage)가 지난 3월 기준 2억 3000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국내서도 검색량이 증가하고 있다. 네이버 검색광고 키워드 조회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 ‘롱샴’을 키워드로 검색한 횟수는 PC·모바일 합산 37만6000여 건에 이른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최근 1년 간 '롱샴'을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최근 1~2개월 급상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네이버 키워드 검색 화면 캡처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최근 1년 간 '롱샴'을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최근 1~2개월 급상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네이버 키워드 검색 화면 캡처

SPA 브랜드의 ‘잇 백’

영국 패션 플랫폼 리스트(Lyst)는 지난해 말 ‘2023 올해의 패션’ 중 ‘올해의 가방’ 부문 1위로 유니클로의 라운드 미니 숄더백을 꼽았다. 나일론 소재 크로스 백으로, 가방 몸체 부분이 반달 모양 같아 일명 ‘반달 백’으로 불린다. 간결한 디자인과 실용성, 뛰어난 수납력을 갖춘 데다, 1만 원대라는 저렴한 가격이 더해지면서 인기를 끌었다.

글로벌 패션 플랫폼 리스트는 '2023 올해의 가방'으로 유니클로의 1만원대 라운드 미니 숄더백을 선정했다. 사진 유니클로

글로벌 패션 플랫폼 리스트는 '2023 올해의 가방'으로 유니클로의 1만원대 라운드 미니 숄더백을 선정했다. 사진 유니클로

라운드 미니 숄더백은 광고나 셀럽 마케팅이 아니라 일반 소비자들의 리뷰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입소문을 탔다. 유니클로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2022년 4월 영국의 한 고객이 틱톡에 올린 동영상이 약 1억1900만 회의 누적 조회 수를 기록하며 확산했고, 이후 국내서도 이른바 ‘가성비 가방’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한때 품절 사태를 겪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남성이 매도 위화감이 없는 ‘젠더리스(genderless·성별 구별이 없는)’ 디자인도 인기 요인 중 하나다.

틱톡에서 유니클로 라운드 미니 백을 검색하면 수 많은 리뷰 영상이 나온다. 사진 틱톡 화면 캡처

틱톡에서 유니클로 라운드 미니 백을 검색하면 수 많은 리뷰 영상이 나온다. 사진 틱톡 화면 캡처

지난해 이른바 ‘구름백’으로 회자했던 코스(COS)의 퀼티드 백 역시 대표적인 SPA(제조·유통 일괄) 브랜드발 잇백이다. 지난 2021년 블랙핑크 제니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등장한 이후 최근까지 인기 스타일로 군림하고 있다.

구름같이 푹신한 질감과 일상 소지품을 보관하기 좋은 넉넉한 수납공간, 가벼운 무게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지난해 5월에는 전 세계 최초로 서울 익선동에 퀼티드 백 팝업 스토어를 열기도 했다. 당시 팝업 현장은 동나기 일쑤였던 퀼팅 백을 구하기 위한 소비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코스는 지난해 5월 서울 익선동에서 퀼티드 백을 주제로한 팝업 스토어를 운영했다. 사진 코스

코스는 지난해 5월 서울 익선동에서 퀼티드 백을 주제로한 팝업 스토어를 운영했다. 사진 코스

하이힐보다 운동화, 가죽보다 나일론

나일론 백의 3연타 히트의 배경으로는 최근 패션계의 큰 흐름인 ‘캐주얼 선호’가 꼽힌다. 하이힐보다는 운동화, 포멀한 정장보다는 트레이닝 복이나 레깅스, 가죽 소재의 딱딱한 가방보다는 가볍고 실용적인 패브릭 가방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블랙핑크 제니의 일명 '보부상백'으로 입소문을 탄 코스 퀼티드 백. 사진 제니 인스타그램

블랙핑크 제니의 일명 '보부상백'으로 입소문을 탄 코스 퀼티드 백. 사진 제니 인스타그램

그래서 요즘 인기 가방을 이해하는 핵심어가 ‘휘뚜루마뚜루’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해치운다는 뜻의 순우리말로, 최근에는 아무 차림에나 쉽게 들 수 있는 가방을 두고 ‘휘뚜루마뚜루 가방’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포털 사이트에 해당 단어의 연관 검색어로 가방, 명품백, 크로스백 등이 올라와 있다.

짐을 많이 넣는 이른바 ‘보부상’ 트렌드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 ‘마이크로(micro)’ 사이즈까지 줄어들었던 ‘미니백(mini bag)’의 유행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최근 다시 ‘빅백(big bag)’이 부상하는 와중, 사이즈는 작지만 물건을 많이 넣을 수 있는 수납력 좋은 나일론 가방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풀이된다. 주로 로고 없는 심심한 디자인으로 키링이나 인형 등 액세서리를 달아 이른바 ‘백꾸(가방 꾸미기)’ 하기 좋다는 장점도 있다.

최근 나일론은 재활용 나일론인 '리나일론' '에코닐' 등 지속 가능한 소재로 거듭나고 있다. 사진 프라다

최근 나일론은 재활용 나일론인 '리나일론' '에코닐' 등 지속 가능한 소재로 거듭나고 있다. 사진 프라다

싸구려 합성 섬유의 대명사였던 나일론 소재 자체에 대한 인식 변화도 한몫한다.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프라다는 나일론을 브랜드를 대표하는 소재로 삼고 있다. 최근에는 ‘에코닐’ ‘리나일론’ 등 폐기물을 재활용한 나일론 소재가 개발되면서 지속가능한 소재로 거듭나고 있기도 하다. 롱샴 관계자는 “롱샴은 현재 가방에 사용하는 나일론 소재를 100% 재활용 소재로 만들고 있다”며 “실용적이면서도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젊은 소비자들의 기호를 반영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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