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조용히 공부? 고정관념 깼다…순식간에 5만명 몰려온 이 곳 [비크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b.플레이스

"거기 가봤어?" 요즘 공간은 브랜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장소를 넘어 브랜드를 설명하고, 태도와 세계관을 녹여내니까요. 온라인 홍수 시대에 직접 보고 듣고, 만지며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은 좋은 마케팅 도구가 되기도 하죠. 비크닉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합니다. 화제의 공간을 만든 기획의 디테일을 들여다봅니다.

“도서관의 경쟁자는 카페”

요즘 도서관 사서들 사이에서 나오는 우스갯소리다. 책 읽고, 공부하고, 모임하는 과거 도서관의 기능이 점차 카페로 옮겨가면서다. 규격화된 공간에서 기침 소리 한번 내기 힘든 도서관이 부담스러운 이들의 대안이다. 하지만 최근엔 변신을 시도하는 도서관이 적지 않다. 갤러리 같은 세련된 인테리어를 자랑하거나, 주민들이 북적대는 만남의 광장이 되거나, 일부러 찾아올만큼 지역의 명소가 되면서 도서관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12일 ‘도서관의 날’을 맞아 새로운 실험을 진행 중인 도서관 두 곳을 찾았다. 도서관의 날은 도서관에 대한 국민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해 지난해 처음 법정기념일로 지정됐다.

각종 문화 프로그램 갖춘 동네 사랑방

웅장한 원형 공간 속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바닥 가득 내린다. 인공조명 없이도 충분히 밝은 분위기에 실내에 있어도 마치 야외에 있는 듯한 개방감을 느낄 수 있다. 지난달 26일 찾은 강원도 ‘인제 기적의도서관’ 의 모습이다. 문·칸막이 같은 장애물이 없어 어디에 서 있든 공간 전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지난해 6월 강원도 인제군에 문을 연 '인제 기적의도서관'. 사진 신경섭 작가

지난해 6월 강원도 인제군에 문을 연 '인제 기적의도서관'. 사진 신경섭 작가

개방감을 극대화한 도서관답게 책만 구비해 두지 않았다. 마치 갤러리처럼 건물 곳곳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도서관 한쪽에 마련된 '미디어아트' 섹션에선 인제군의 역사와 자연을 담은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설악산·자작나무 숲 등 인제군을 대표하는 관광 자원을 주제로 활용했다. 또 4개 벽면을 가득 채운 미디어아트에다 서재 한쪽에는 ‘XR 뮤지엄(확장현실 박물관)’ 코너가 마련돼 있다. 조이스틱을 움직이면 반 고흐, 구스타프 클림트 작품 등을 실제 미술관을 거니는듯한 느낌으로 관람할 수 있다.

인제 기적의도서관 한쪽에 마련된 '미디어아트' 공간. 사진 서혜빈 기자

인제 기적의도서관 한쪽에 마련된 '미디어아트' 공간. 사진 서혜빈 기자

인제 기적의도서관은 지난해 6월, 지역 문화 거점 공간이자 주민 커뮤니티 시설을 지향하며 문을 열었다. 도서관은 조용히 공부하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다양한 문화를 즐기는 곳으로 인식되기를 바란다는 취지가 담겼다. 개관 이후 반 년간 인문학 강연, 음악회, 마술극 등 문화 프로그램만 50여 회 넘게 진행한 이유다. 심민석 도서관장은 “처음 방문이 어렵지 도서관에 한 번만 와봐도 이 공간에 익숙해지고 또 오고 싶어질만큼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동네 사랑방’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개관 후 반년 동안 이곳을 방문한 이용객은 5만명이 넘었다. 인제군 인구 3만2000명을 훨씬 넘어서는 숫자다. 일주일에 4~5번 도서관에 방문한다는 한미림(34)씨는 “이곳에 오면 다양한 프로그램도 접할 수 있는 데다 인제군 지역 이야기와 동네 사람들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학교∙학원만 돌던 청소년들의 제3지대

성남시 중원구엔 청소년만을 위한 도서관도 있다. 9개 초∙중∙고등학교가 모인 지역 중심에 있는 ‘라이브러리 티티섬’은 2021년 여름에 문을 열었다. 많은 청소년이 걸어서 쉽게 올 수 있는 곳에 터를 잡았다. 겉으로 보기엔 도무지 도서관처럼 보이지 않는 회색빛 대형 건물의 9층에 올라가면 4개 층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세계가 펼쳐진다.

라이브러리 티티섬 10층에 마련된 클라이밍 공간과 악기 연주 공간. 사진 라이브러리 티티섬

라이브러리 티티섬 10층에 마련된 클라이밍 공간과 악기 연주 공간. 사진 라이브러리 티티섬

지난 3일 찾아간 티티섬은 도서관이라고 부르기 어색할 만큼 활기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쪽에선 기타를 치고, 다른 한쪽에선 재봉틀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든다. 도서관인데 요리하는 부엌, 식물을 키우는 실내정원을 비롯해 악기 연주 공간과 클라이밍 공간도 있다. 도서관 곳곳이 마치 ‘섬’처럼 따로따로 저마다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티티섬은 비영리단체 도서문화재단 씨앗이 운영하는 ‘공공’ 도서관으로,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재단은 ‘도서관을 떠난 청소년들은 어디로 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티티섬 설립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공부나 입시에 몰려 다양한 경험을 접할 기회가 없는 청소년을 위해 ‘제3의 장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청소년 일과 시간에 맞춰 도서관을 여는 시간도 오후 1시부터 9시까지로 조정했다.

라이브러리 티티섬 9층에 마련된 실내 정원에서 청소년들이 식물에 물을 주고 있다. 사진 라이브러리 티티섬

라이브러리 티티섬 9층에 마련된 실내 정원에서 청소년들이 식물에 물을 주고 있다. 사진 라이브러리 티티섬

조은정 라이브러리 티티섬 관장은 “지역에 청소년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며 “도서관조차 조용히 해야 한다거나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 등 특정 자격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공간이라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청소년이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티티섬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티티섬 프로젝트 결과는 성공적이다. 학원이나 입시 준비로 바쁜 청소년들이 도서관에 안 올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매일 평균 청소년 130여명이 방문한다. 청소년들은 방과 후 또는 학원 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자기만의 섬을 찾는다. 이곳에 방문한 청소년들은 평균 2시간 정도 머물며 개인 시간을 보내거나 동네 친구들과 교류한다.

자기만의 속도를 찾는 것도 이곳의 규칙이다. 도서 대출보다 매일 티티섬에 들러 조금씩 책을 읽어나가는 청소년이 많다. 만들던 공예품을 잠깐 보관한 뒤 다음 날 다시 와서 작품을 완성해 간다. 이곳은 사랑방 역할도 한다. 청소년 이용자들은 티티섬 중앙 로비에 앉아 오늘은 어떤 친구들이 올지 기다린다. 이 과정에서 나이 구분 없이 모두 친구가 된다. 그래서인지 티티섬 이용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내일 또 보자”라는 인사다.

올해 1월 라이브러리 티티섬 라운지에서 열린 새해파티. 사진 라이브러리 티티섬

올해 1월 라이브러리 티티섬 라운지에서 열린 새해파티. 사진 라이브러리 티티섬

“미래 도서관은 사람·정보·기술이 모이는 곳”

공간은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반영할 때 가장 잘 쓰일 수 있다. 인제 기적의도서관과 라이브러리 티티섬의 공통점은 설립 단계부터 예비 이용자들이 기획 단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기적의 도서관은 10명의 청소년 준비단과 함께, 티티섬은 23명의 지역 청소년과 함께 수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기획단은 각자 원하는 도서관의 쓰임새에 맞게 공간 구성 아이디어를 냈다.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 도서관의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할까. 조 관장은 “도서관은 책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공간이 돼야 한다”며 “편하게 올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균등하게 정보를 얻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호 상명대 문헌정보학 교수는 “전통적인 도서관은 더는 의미가 없다”며 “도서관은 지역에서 사람과 정보와 기술이 모이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전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