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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긴 왜 버려? 못난이 푸드의 반전…강남 상권마저 흔든다 [비크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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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b.트렌드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도 반복되면 의미가 생깁니다. 일시적 유행에서 지속하는 트렌드가 되는 과정이죠. 트렌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를 반영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모호함을 밝히는 한줄기 단서가 되기도 하고요.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트렌드를 건져 올립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에서는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서 유의미한 ‘통찰(인사이트)’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못생긴 당근? 수프에 들어가면 무슨 상관이야?" "흉측한 오렌지? 예쁜 주스가 되는걸?”

웃음 나오는 이 도발적인 슬로건은 프랑스 슈퍼마켓 체인 '인터마르쉐(Intermarche)'가 2014년 진행한 '이상한 농산물' 캠페인 문구입니다.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지는 농산물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작한 일이죠. 인터마르쉐는 못난이 농산물을 30% 할인된 가격에 판매했어요. 덕분에 한 달 만에 무려 1300만 명의 고객이 마트에 다녀갔죠.

인터마르쉐가 2014년 진행한 ‘이상한 농산물’ 캠페인 포스터. 사진 인터마르쉐

인터마르쉐가 2014년 진행한 ‘이상한 농산물’ 캠페인 포스터. 사진 인터마르쉐

울퉁불퉁한 모양에 알록달록한 색깔을 띤 못생긴 농산물의 재탄생. 이를 '푸드 리퍼브(Food Refurb)'라고 불러요. 음식(Food)과 재공급(Refurbished)의 합성어예요. 프랑스 인터마르쉐 캠페인을 시작으로 푸드 리퍼브는 유럽∙미국 등으로 확산됐어요. 미국에선 못난이 농산물 판매 업체가 유니콘 기업이 되기도 했죠.

최근 국내에서도 푸드 리퍼브에 대한 관심이 한층 커지고 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얇아진 지갑 사정 때문이랍니다. 고물가 시대 속 가성비 소비를 하려는 움직임에다 '친환경∙가치 소비'를 원하는 소비 패턴이 맞물리며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죠. 비크닉에서는 못생김이 무기가 되는 새로운 트렌드를 짚어보려고 해요.

못난이만 사고 판다…고물가 속 새로운 소비 현상

직장인 김혜진(31)씨는 ‘집밥’을 고집하는 1인 가구예요. 김씨 요리의 특징은 재료. 못생긴 채소와 과일로 화려한 식단을 꾸미거든요. 2022년부터 못난이 농산물로 요리했다는 김씨는 “물가가 계속 올라 장보기가 무서웠는데 대안을 찾아 만족스럽다"고 전했어요. 윤지수(39)씨도 못난이 소비로 매번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못난이 양송이버섯 한 박스(1kg)를 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샀거든요. 마트에선 5000원에 겨우 5알 정도 살 수 있는데 말이죠.

김혜진씨가 못난이 농산물로 만든 ‘집밥’. 사진 김혜진씨 제공

김혜진씨가 못난이 농산물로 만든 ‘집밥’. 사진 김혜진씨 제공

고물가 시대를 이겨내려는 새로운 소비 패턴 등장에 못난이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플랫폼들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못난이 농산물 정기 구독 서비스 ‘어글리어스’를 운영하는 캐비지는 2021년 서비스 출시 3년 만에 누적 가입자 수 23만 명, 누적 매출액 100억 성과를 냈습니다. 소비자 재구매율은 88%에 이른대요. 최현주 캐비지 대표는 "최근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올 1분기 신규 가입자가 전년 동기 대비 113%나 늘었다"고 했어요.

오픈마켓 방식으로 못난이 농산물을 판매하는 ‘못난이마켓’의 경우, 지난해 1월 서비스를 출시한 뒤 1년 만에 매달 3만 명이 찾는 플랫폼이 됐어요. 김영민 못난이마켓 대표는 “전체 농산물 중 못난이 비율은 10~30% 정도인데도, 가격이 일반 농산물보다 20~50% 싸다 보니 훨씬 먼저 동난다”고 했습니다.

백화점∙화장품 업체까지 나선 못난이 열풍

못생긴 농산물의 인기에 유통업계도 나섰습니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 15일부터 일주일간 ‘착한 과일’ 행사를 열고 10개 점포에서 과일·채소 11종을 최대 58% 할인 판매했어요. 일주일간 판매한 못난이 농산물은 약 14톤. 소비자 관심이 높아 올해 하반기에도 행사를 한 번 더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공영홈쇼핑도 지난 14일부터 '못생겼지만 예쁜 가격, 못쁜이 특집전' 진행했어요. 라이브커머스로 못생긴 농산물 100여 종을 할인 판매했죠.

킴스클럽이 판매하는 못난이 사과. 사진 이랜드킴스클럽

킴스클럽이 판매하는 못난이 사과. 사진 이랜드킴스클럽

킴스클럽이 한 봉지(1.6㎏)에 1만 원으로 파는 못난이 사과도 인기래요. 올해 1~2월에 전년 동기 대비 못난이 사과 매출이 120%나 증가했죠. 농가 직거래로 사과 수확기에 물량을 대량 확보하고 전용 저장 센터에 보관해 가격을 줄였다고 해요. 홍임경 이랜드킴스클럽 담당자는 "고급 포장지에 담긴 비싸고 좋은 상품만 고집하던 강남 상권마저 태도가 달라지면서 못난이 구매가 소비 트렌드가 됐다"고 말했죠.

먹거리를 넘어서서 못난이 컨셉트로 화장품을 만든 곳도 있어요. LG생활건강은 지난해 11월 '어글리 러블리' 브랜드를 론칭했어요. 농가에서 버려질 뻔한 못난이 농산물에서 원료를 추출해 화장품을 만든 겁니다. 현재 올리브영 온라인몰, 더현대 오프라인 매장 등 국내 유통 채널에 입점했고, 동아시아 7개국에 진출했대요. 최근엔 일본의 한 여성 패션 월간지에 소개되면서 제품을 찾는 일본 소비자가 늘었다고 해요.

LG생활건강이 못난이 농산물로 만든 화장품. 사진 LG생활건강

LG생활건강이 못난이 농산물로 만든 화장품. 사진 LG생활건강

지속가능한 환경 만드는 '못난이 경제학'

모양이나 색깔이 규격에 맞지 않아 우리나라에서 한 해 버려지는 농산물 규모는 약 5조원이래요. 유엔식량농업기구(UNFAO)는 전 세계에서 버려지는 농산물이 한해 13억 톤으로, 전체 농산물의 30%에 달한다고 발표하기도 했죠(2019년 기준). 이렇게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는 기후변화에 큰 영향을 미쳐요. 음식물 쓰레기가 뿜어내는 메탄의 온실효과는 이산화탄소의 28배나 되거든요.

못난이 농산물 소비의 진짜 가치는 단순히 저렴한 가격만이 아니에요. 소비자 입장에선 싼값에 제품을 구매하면서도 '친환경∙가치 소비'에 동참할 수 있고, 유통사 역시 재고∙폐기 비용을 줄일 수 있고요. 못난이 농산물로 누구나 손쉽게 지속가능한 환경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거예요.

어글리어스 못난이 농산물 홍보 사진. 사진 어글리어스 인스타그램

어글리어스 못난이 농산물 홍보 사진. 사진 어글리어스 인스타그램

앞으로 푸드 리퍼브 시장은 점점 커질 거라는 전망이 대세예요. 가성비 좋고, 가치 소비까지 할 수 있는데 못난이들을 마다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죠. 홍종호 서울대 교수(환경대학원)는 “최근 유통업계에서 못난이 농산물이 맛과 영양은 똑같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주면서 일종의 ‘시그널링 효과(정보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정보를 가진 쪽이 적극적으로 알리려고 취하는 행동)’가 발생했다”면서 “과거보다 못난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 이 시장은 더 성장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기 때문에 더 정감 가는 못난이들. 친환경 요리부터 비건 화장품까지, 어떤 형태든 변신할 수 있는 못난이 시장은 과연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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