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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나라 위기 극복 위한 여야 협치가 총선의 명령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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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이 1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4·10 총선 결과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이 1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4·10 총선 결과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3대 개혁 달성 위해 민주당의 협조 절실

윤 대통령이 이재명 대표와 대화 나서야

연립정부 총리 등 협치 시스템도 고려를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민의의 모든 것이자 국정 질서의 변화를 추동하는 엔진이다. 그제 실시된 22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한국 정치에서 이제 여야의 협치가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요소임을 선언하는 계기가 됐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108석에 그쳤지만 야당은 더불어민주당 175석, 조국혁신당 12석 등으로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국회 주도권을 쥔 야당은 국민의힘이 추진하는 모든 정책을 막을 수 있고, 반면에 윤석열 대통령도 야당이 단독 처리한 법안은 저지할 거부권을 확보했다. 이런 구조는 여야가 상대의 정책·법안이라면 무엇이든 중단시키는 비토크라시(vetocracy)의 비극도 예고한다.

이미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지난 2년간 그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다만 집권 초반부는 대통령 권력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라 거대 의석의 민주당도 여론을 의식해 이따금 양보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22대 국회는 선거운동 기간에 ‘대통령 탄핵’이 거론됐을 정도로 증오와 분노가 폭주할 기미를 보인다. 용산의 발언권도 집권 초만 못하다. 이대로라면 22대 국회는 무한 정쟁에 빠져 효율과 생산성이 바닥으로 떨어질 게 뻔하다. 벌써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선거 다음 날 기자회견을 열어 “검찰이 김건희 여사를 즉각 소환해 조사하지 않으면 김건희 여사 종합특검법을 추진하겠다”고 을러대는 상황이다. 여당 총선 참패의 빌미를 제공한 윤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 스타일이 과연 어떻게 바뀔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물론 협치는 힘들다. 그래도 지금 협치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한국의 상황이 절박해서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연금·노동·교육의 3대 개혁은 세계에서 가장 급속한 저출생·고령화 추세를 겪고 있는 한국의 생존을 위해선 반드시 달성해야만 할 절체절명의 과제다. 이는 민주당이 집권했어도 마찬가지로 팔을 걷어붙일 수밖에 없는 국가적 책무다. 이런 개혁 정책들은 반드시 입법이 필요하다. 그 때문에 정부 홀로 추진할 수 없고,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런 개혁 정책들은 퍼주기 정책과 정반대로 기득권 해체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반발을 사기 십상이다. 그래서 정치권의 단합된 목소리가 없으면 성공하기가 어렵다. 특히 국회 의석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민주당의 협조가 절실한 이유다.

가령 22대 국회에서 첨예한 이슈가 될 국민연금 개혁은 작금의 고령화 추이를 고려하면 ‘더 내고 덜 받는’ 방향 말고는 다른 대안이 나올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국회 절대다수 의석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인기 없는 개혁이란 이유로 국민연금에 아예 손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연금 재정 위기는 계속 심화했다. 윤석열 정부는 의석이 부족해 이젠 연금개혁을 억지로 밀어붙일 능력도 없다.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정부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번 정부도 연금개혁을 나 몰라라 할지 모른다. 민주당이 집권을 꿈꾸는 수권정당이라면 인기 없는 개혁은 차라리 야당 시절에 해치우는 게 장래의 정치적 부담을 줄이는 길이다. 그뿐 아니라 의대 입학정원 확대를 비롯한 의료개혁,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개편, 대학 구조조정, 조세제도 개혁, 미래세대 먹거리 창출 등의 굵직한 과제 역시 여야의 협치 없이는 불가능하다.

급속히 악화하는 재정 여건도 정부가 운신할 폭을 좁히고 있다. 어제 정부의 ‘2023 회계연도 국가결산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채무는 1126조7000억원으로 전년보다 59조4000억원 늘었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1982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처음으로 절반이 넘는 50.4%에 달했다. 재정이라도 넉넉하면 정부가 개혁에 반발하는 진영을 달랠 선심 정책을 곁들일 텐데 지금은 그러기도 쉽지 않다. 결국 대통령·여당과 야당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합심하는 길밖엔 방법이 없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심상찮다. 올해 미국 대선에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한·미 동맹에 여러 가지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또 미·북 간 직거래가 재개되면 한반도 문제의 논의에서 한국이 소외되는 사태도 예상할 수 있다. 최근 러시아가 유엔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의 임기 연장을 거부하면서 대북제재 감시망에 구멍이 뚫린 것도 심상찮다. 한국과 중국의 냉기류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없다. 이런 외교안보 사안에서도 국익을 위해 여야가 조율된 목소리를 내고, 서로 역할을 나눠 물밑에서 의원 외교를 펼친다면 나라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협치의 성공을 위해선 무엇보다 윤 대통령의 변신이 절실하다. 윤 대통령은 총선 참패 뒤 “총선에 나타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고 경제와 민생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맞다. 민주당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국정이 마비된다는 현실을 철저히 깨닫고 먼저 야당에 손을 내밀기를 바란다. 취임 후 한 번도 없었던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의 회담도 이제는 적극 추진해 달라. 여·야·정 정책협의체도 상설기구로 가동하면서 야당의 아이디어도 수용할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하자.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어제 한덕수 국무총리와 대통령실 고위 참모들이 모두 사의를 표명했다. 어차피 새 총리도 야당의 동의가 없으면 임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예 민주당의 의사를 물어 연립정부형 인사를 총리로 지명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또 능력 있는 야당 인사를 장관에 기용할 수도 있다. 여야 협치를 단발성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정착해야 한다. 민주당도 국정에 절대 책임이 생긴 이상 여야 협치에 적극 임해야 한다. 거대 의석을 쥐고도 정부 발목잡기에만 골몰한다면 반드시 국민의 역풍을 맞게 된다.

지금 대내외 여건은 한눈팔 새도 없이 급변하고 있다. 21대 국회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22대 국회에서도 정쟁으로 날 새울 여유조차 없다. 이번에도 협치에 실패하면 대한민국이 침몰한다는 점을 여야 모두 똑똑히 명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