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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지금 의료계에 필요한 건 막말이 아니라 합리적 대안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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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2월 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열린 대한전공의협의회 긴급 임시대의원총회에 김택우 의협 비대위원장과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이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 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열린 대한전공의협의회 긴급 임시대의원총회에 김택우 의협 비대위원장과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이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일진 부모” “내부의 적” 비난만 쏟아내는 의료계

진정 공보의·학생 염려한다면 의견 수렴 서둘러야

정진행 서울대 의대 비상대책위원회 자문위원이 지난 6일 SNS에 “우리 집 아들이 일진에게 엄청나게 맞고 왔는데 피투성이 만신창이 아들만 협상장에 내보낼 순 없다”고 썼다. 그는 “일진 부모를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도 했다. 전공의와 학생을 염려한 글이라곤 하지만, 지난 4일 윤석열 대통령과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의 만남으로 시작된 의정 대화에 찬물을 끼얹는 표현이다. 특히 윤 대통령을 ‘일진 부모’에 비유한 대목은 납득하기 어렵다. 노환규 대한의사협회 전 회장은 “요즘 이과 국민이 나서서 부흥시킨 나라를 문과 지도자가 말아먹는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는 황당한 글을 올렸다.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발표 이후 1만 명 넘는 전공의들이 병원을 이탈하면서 환자들의 불안이 극에 달한 상태다. 윤 대통령과 한덕수 총리가 연일 “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모처럼 사태 해결의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이 기회를 잘 살려서 전공의와 의대생의 복귀를 이끌어야 할 의료계에선 실망스러운 언행이 이어진다.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만남만 해도 그렇다. 회동 직후 박 위원장은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는 없다”고 부정적 반응을 내놨으나, 대통령실은 “향후 의사 증원 등에 관해 논의할 때 전공의들의 입장을 존중하겠다”며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이 흐름을 잘 살려서 전공의와 의대생이 병원과 학교로 돌아와 환자 곁을 지키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의료계가 할 일이다. 하지만 회동이 끝난 직후부터 임현택 차기 대한의사협회 회장 당선인이 “내부의 적”이라는 글을 올리는 등 여기저기서 원색적인 공격을 쏟아냈다. 박 위원장을 탄핵해야 한다는 성명서까지 돌았다.

꽉 막혔던 의·정 간에 소통이 시작됐고, 정부는 “최소한의 수치”라고 고집해 온 ‘2000명 증원’을 양보할 의향을 내비치고 있다. 이제 의료계는 신속하게 내부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정부와 의사단체가 협의해야 할 사안은 의대 증원 규모뿐 아니라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과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부담 완화 같은 의료계의 숙원도 포함돼 있다. 양쪽이 머리를 맞대고 합의점을 찾는다면 전공의들에게도 많은 혜택이 돌아갈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의사단체 사이에선 협상을 진전시키려는 진지한 노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을 전공의의 ‘부모’라고 주장하는 의사단체 리더들은 자식 같은 전공의와 의대생을 위해서라도 정부와 협의가 가능한 협상안을 내놔야 하지 않겠나. 어제 열린 의협 7차 비대위 회의에서 “의협 비대위는 전공의들과 학생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밝힌 만큼 논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어가야 한다. 그것이 유급 위기에 처한 제자들을 돕는 방법이며,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를 살리는 길이다.